
새 단위(리터, 킬로그램, 미터)의 사용을 그린 판화. L.F. 라브루스, 1795년 • 위키미디어 커먼즈
프랑스 혁명 전야를 여행하던 영국 농학자 아서 영(Arthur Young)은 길에서 만난 놀라운 도량형의 난립에 경악했다. 그는 "단위는 주(province)마다 다를 뿐 아니라, 현(canton)마다, 거의 도시마다 달랐다"며 탄식했다. 당시 800여 개의 단위 명칭 뒤에는 무려 25만 가지에 달하는 서로 다른 값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기준을 찾아서
이러한 비일관성이 자의성을 조장하고 소통과 교역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직시한 계몽주의 학자들은, 도량형을 통일해 국가 간 무역과 과학 교류를 원활히 하자는 개혁을 앞다투어 주장했다. 이탈리아의 티토 리비오 부라티니(Tito Livio Burattini)는 초를 치는 진자의 길이에 해당하는 단위를 채택할 것을 권했는데, 이는 갈릴레오의 오랜 아이디어에 새 삶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단위에 '미터(mètre)'라는 이름을 붙여 더 큰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계몽주의자들은 이러한 개혁의 성공에 대해 큰 환상을 갖지 않았다. 도량형의 혼란에 경악한 백과전서파 디드로와 알랑베르 역시 질서를 세우기를 포기한 바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바로 그들이 기다려온 기회, 즉 전통과 결별해 새로운 토대 위에 사회를 재건할 절호의 찬스였다.
계몽주의 학자들은 18세기 프랑스에 공존하던 수천 가지 단위 값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기다려온 격변은 1789년 8월 4일, 특권이 폐지된 그 밤에 일어났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3주 후인 1789년 8월 4일 밤, 특권 폐지 결의는 영주들이 독점하던 도량형 권한마저 없앴고, 이후 시민들의 개혁 제안이 우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몇 달 전, 저명한 천문학자 제롬 드 랄란드(Jérôme de Lalande)는 이미 "파리의 단위를 전국에 강제한다"는 매우 단순한 해법을 내놓은 바 있었다. 다른 시대였다면 이 제안이 선택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탈레랑(Talleyrand)에게 파리식 도량형의 채택은 "대상의 중요성에도, 계몽되고 까다로운 사람들의 기대에도 아직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콩도르세(Condorcet)의 표현을 빌리면, 이 측정 기준이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게 바쳐질 좋은 선물로 인정받으려면 자연에서 추출된 것이어야만 했다. 탈레랑이 국민의회에 제안한 것이 바로 이 요구였다.
하나의 기본 단위
새 측정 체계를 설계하는 협의가 이어졌다. 길이·면적·무게 등 모든 단위가 하나의 기본 단위에서 파생되며 10의 거듭제곱으로 단계를 이룬다는 구상이었다. 이 기본 단위는 '미터'로 명명되었고, 수학자 오귀스트사비니앙 르블롱(Auguste-Savinien Leblond)의 귀에는 "너무나 표현력이 풍부하고 […] 거의 프랑스적인 이름"으로 들렸다. 하위 단위는 라틴어 접두사(데시미터, 센티미터, 밀리미터), 배수 단위는 그리스어 접두사(데카미터, 헥토미터, 킬로미터)로 시작하게 되었다. 제안이 채택되자 화학자 앙투안 로랑 드 라부아지에는 "인간의 손에서 이토록 위대하고 단순하며, 모든 부분이 일관된 결과물이 나온 적이 없었다"고 평했다.
새 체계의 기본 단위를 확정하기 위해 국민의회와 과학아카데미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측량학자 가스파르 몽주(Gaspard Monge),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피에르시몽 드 라플라스(Pierre-Simon de Laplace), 철학자이자 수학자 콩도르세 등—이 참여하는 도량형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렇다면 '미터'는 어디서 얻어야 할까? 여러 가능성을 검토한 끝에 위원회는 미터를 '북극점과 적도를 잇는 거리의 1,000만 분의 1'로 정하고, 덩키르크에서 파리를 거쳐 바르셀로나에 이르는 자오선 호(arc of meridian)를 측정해 이 값을 산출하기로 했다. 천문학자 장바티스트 들랑브르(Jean-Baptiste Delambre)와 피에르 메생(Pierre Méchain)이 이 거대한 측정 사업을 분담했는데, 한 사람은 덩키르크에서, 다른 한 사람은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했다. 두 사람은 1799년 임무를 완수했고, 같은 해 12월 10일 십진법 미터법이 공식 채택되었다.
나폴레옹, '통용 단위'를 채택하다
공화국의 집정관이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렇게 선언했다. "정복은 왔다가 사라지지만, 이것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거둔 과학의 승리는 결실을 맺는 데 더디었다. 뿌리 깊은 구 단위의 사용은 상업 현장에서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관성 앞에 무력했던 제정 정부는 결국 물러섰다. 1812년 2월 12일, 러시아 원정 준비가 한창이던 시기에 '통용 단위(mesures usuelles)'가 채택된 것이다. 이 체계는 미터법의 공식 지위를 유지하는 동시에 구체제의 파리식 도량형에 가깝게 다듬었다. 예컨대 폐지되었던 토와즈(toise)의 사용을 부활시켰지만, 길이는 종전의 1.949m가 아닌 2m로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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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새 단위들 역시 미터법만큼 성공하지 못했고, 복고왕정기에는 구체제의 도량형 기준이 되돌아왔다. 생헬레나로 유배되어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나폴레옹은 계몽주의를 공격하며 그 과욕을 조롱했다. "그들은 4천만 명을 위한 선을 행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우주 전체를 그 안에 끌어들이려 했다."
전 세계로 퍼지다
1837년에 이르러서야 루이필리프(Louis-Philippe) 국왕은 혁명의 유산을 계승해 국가를 근대화하겠다고 선언하며 '통용 단위'를 철폐하고 미터법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미 이 분야의 개척자 지위를 잃은 뒤였다.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을 겪었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는 프랑스보다 무려 20년 앞서 있었다. 네덜란드의 빌럼 1세 국왕은 1820년 미터법 채택을 공식화했고,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벨기에 역시 10년 뒤 이를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미터는 마침내 설계 당초의 목적대로—국민 통합과 국제 교류의 촉진이라는 사명을—수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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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터법의 채택은 국내외적 유대를 강화하는 데도 기여했는데, 스페인 식민제국이 그 대표적 사례다. 프랑스는 자오선 호의 남쪽 끝점을 바르셀로나의 몽쥐익(Montjuïc) 성에 두고, 수학자이자 해군 출신인 가브리엘 시스카르(Gabriel Císcar)가 이끄는 스페인 위원회에 측정을 의뢰함으로써 스페인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혁명의 발발을 우려한 스페인 왕정은 처음에는 이 초청을 거절했고, 미터법은 이사벨 2세(Isabella II)의 법률에 따라서야 1849년에 채택되었으며, 구 도량형을 완전히 대체하는 데에도 수십 년이 더 걸렸다.
전 세계 사회의 미터 채택은 법제화 직후 곧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교육·교통·상업의 발전과 함께 점진적으로 확산되었다. 지난 2세기 동안 미터법은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표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오직 불굴의 세 영토—미얀마, 라이베리아, 그리고 미국—만이 그 바깥에 남아 있다.
더 읽을거리
『세상을 잰 사람들(Measuring the World) — 미터 발명의 놀라운 이야기』, K. 앨더(Ken Alder) 지음, 플라마리옹(Flammarion, Champs), 2015.
거리에 세워진 미터의 표준기
1795년, 장바티스트 들랑브르와 피에르 메생에게 맡겨진 미터의 정밀 측정을 기다리는 동안 잠정 미터가 채택되었다. 국민에게 이 새로운 단위를 익히게 하기 위해 전단, 포스터, 환산표가 배포되었고, 1796년 2월부터 1797년 12월 사이에는 파리에서 가장 붐비는 장소 16곳에 대리석 표준 미터가 설치되었다. 그중 2개는 오늘날에도 확인할 수 있다.
인정된 오차
자오선 호 측정 당시 피에르 메생은 끝내 비밀로 한 실수를 저질렀다. 북극과 적도 사이의 자오선 길이를 구하는 데 메생과 들랑브르의 미터는 0.2mm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값이 최종적으로 '확정 미터'의 길이로 채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