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커피 한 잔에 흔들린 왕좌: 17~18세기 유럽 카페의 정치사

커피 한 잔에 흔들린 왕좌: 17~18세기 유럽 카페의 정치사
1798년 런던의 카페, 윌리엄 홀랜드 그림 ⓒ 위키미디어 커먼즈

1652년, 런던에 최초의 카페가 문을 열면서 도시 전체가 커피의 물결에 휩싸였다. 최초의 카페를 연 사람은 영국 상인의 아르메니아인 하인 파스쿠아 로제(Pasqua Rosee)로, 그는 동지중해 여행 중 이 검은 음료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이 가게는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잉글랜드 유일의 공화정, 즉 청교도 시대에서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포도주나 맥주와 달리 커피는 청교도들이 소중히 여기던 '절제'의 가치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의 각성 효과는 긴 노동 시간과 명료한 판단을 가능하게 했고, 덕분에 작가와 상인들은 커피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페니 대학'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660년, 런던에는 이미 63개의 카페가 있었고 그곳에서는 정치를 비롯한 온갖 화제가 오갔다. 찰스 2세의 측근이었던 윌리엄 코번트리 경(Sir William Coventry)은 크롬웰 집권기에 왕당파들이 카페에서 회합을 가졌으며, "크롬웰의 지지자들은 그곳에서 다른 어떤 곳에서도 감히 누리지 못했던 표현의 자유를 향유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커피하우스가 정부 행보에 대한 토론과 비판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국왕은 1675년 이들의 폐쇄를 명령한다. 그러나 이 조치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정부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500파운드를 내고 충성 서약을 한 카페에는 6개월의 유예 기간을 주겠다는 타협안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지침은 만장일치로 무시되었고, 문을 닫은 카페는 단 하나도 없었다.

금지령이 여론을 그토록 격분시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번영하는 상업 제국의 선두에 선 새롭고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 사회의 일상 속 깊이 카페가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페는 사업가들의 만남의 장이었고, 세계적인 보험회사 로이즈(Lloyd's)처럼 중요한 경제 기관이 같은 이름의 카페 안에서 탄생하기도 했다. 어떤 카페는 시인과 작가들을 끌어모았고,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과학자들은 그곳에서 학술 토론을 이어갔다. 누구나 커피 한 잔 값으로 이러한 토론에 참석할 수 있었고, 심지어 직접 입을 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커피하우스는 '1페니 대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긴 나무 테이블 위에 촛불과 담뱃대, 신문이 놓인 런던의 카페는 집단 토론에 더없이 적합한 공간이었다. 시인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가 표현했듯이 "기사, 장인, 귀족, 건달"이 한자리에 어울리는 민주적인 출입 구조가 이러한 성격을 한층 강화했다. 정당들도 이 흐름에 동참했고, 휘그당(자유주의)과 토리당(보수주의)은 곧 카페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기 시작했다.

파리, 철학자들의 모임

18세기 중반 파리의 카페 역시 지식인들의 만남의 장이었고, 계몽 사상가들의 아지트로 자리 잡았다. 디드로는 레장스 카페(Café de la Régence)에서 『백과전서』 편찬 작업을 진행했으며, 프로코프(Café Procope)는 달랑베르와 루소까지 고객으로 꼽을 수 있었다. 다만 프랑스의 언론과 여론이 가혹한 검열에 놓여 있었던 만큼, 파리의 카페는 런던만큼 공격적인 성격을 띠지는 않았다. 대신 유통되는 정보에는 온갖 소문이 뒤따랐고, 경찰은 이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1749년의 한 보고서에는 이런 구절이 남아 있다. "장루이 르클레르크(Jean-Louis Le Clerc)는 프로코프 카페에서 '그보다 못한 왕은 없었으며, 궁정과 각료들이 백성이 극도로 비난하는 불명예스러운 행위를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선언했다."

1789년 7월, 삼부회 의원들과 왕실의 대립은 카페 안의 열기를 순식간에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웅변가들은 정부를 성토했고, 일부 카페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벼서 연설을 들으려는 군중들이 가게 앞에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긴장이 폭발한 것은 7월 12일이었다. 의원 카미유 데물랭(Camille Desmoulins)이 카페 드 푸아(Café de Foy)의 탁자 위에 올라가 군중에게 외친 것이다. "무기를 들라!" 이틀 뒤 민중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이로써 커피는 유럽 정치 문화의 한 풍경으로 자리 잡게 된다.

왕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소란

1675년 12월 29일,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는 카페 금지 포고문을 발표하며 왕실이 이 가게들을 유해하다고 판단한 이유를 밝혔다. "이들은 매우 유해하고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다 […]. 이 가게들에서는 […] 폐하의 정부를 비방하고 왕국의 평화와 안녕을 해치려는 거짓되고 악의적이며 추악한 정보가 모의되고 유포된다." 그렇기에 "폐하는 이 카페들을 폐쇄하고 억제하는 것이 정당하고 필요하다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