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은 제2제국이라고도 불리는 역사적 국가로, 프로이센이 주도한 세 차례의 짧고 성공적인 전쟁을 거친 뒤 1871년 1월 18일 선포되었다.
불과 7년여의 기간 동안 프로이센은 덴마크(1864), 합스부르크 군주국 오스트리아(1866), 그리고 프랑스(1870~1871)를 잇달아 격파하며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주목할 점은 독일 제국이 대중의 민족주의 열광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제국은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과 바이에른, 바덴, 헤센다름슈타트, 뷔르템베르크 등 남부 여러 국가의 세습 군주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전통적인 내각 외교와 합의의 산물이었다. 독일 전체 면적의 3분의 5 이상과 인구의 약 3분의 5를 차지한 프로이센은, 제1차 세계대전 말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제국의 절대적 지배 세력으로 군림했다.
비스마르크와 프로이센의 부상
1866년 8월 23일 체결된 프라하 조약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여러 국가들을 상대로 한 7주 전쟁(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을 종식시켰고, 프로이센의 내정 안정과 독일 전역의 재편을 위한 길을 열었다. 10년 넘게 북유럽의 세력 균형을 위협해 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는 두 지역이 프로이센에 귀속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전쟁 초기에 해산되었던 프로이센 의회는 1866년 7월 3일, 곧 쾨니히그레츠 전투(흐라데츠크랄로베 전투)가 벌어진 바로 그날 새 의원 선거를 치렀다. 선거 결과 자유파의 다수 의석은 크게 줄었고,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대한 평가를 두고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비스마르크의 연전연승은 그들의 자유주의 신념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결국 온건파들이 독일 진보당에서 갈라져 나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접목한 국가자유당을 결성했다.
비스마르크 역시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1862년 빌헬름 1세 국왕과의 헌법 논쟁이 시작된 이래 헌법적 근거 없이 강제 징수해 온 세금에 대해 사후 추인을 요청하는 보상법(면책법)을 제출한 것이다. 이 법안은 1866년 9월 3일 찬성 230표 대 반대 75표로 통과되었다.
보상법, 독일 근대사의 결정적 분기점
이것은 독일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동안 비스마르크의 가장 강경한 정적이었던 프로이센 자유파는, 독일 통일이라는 미래와 통일 국가가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확신을 대가로 의회 주권에 대한 요구를 접었다. 권력 다툼은 타협으로 바뀌었다. 자본주의 중산층은 더 이상 국가 장악을 요구하지 않았고, 융커 지배 계급은 중산층의 이익과 시각에 맞춰 국정을 운영했다. 중산층이 자유주의자가 아니게 된 만큼, 프로이센의 융커들 역시 '프로이센 사람'이 아닌 '독일인'이 되어 갔다.
그러나 어느 쪽도 이 거래를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다. 제국 시대 내내 헌정 갈등이 재연될까 하는 경계는 늘 존재했다. 그럼에도 1866년 9월 3일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 독일은 진정한 의미의 입헌군주제 국가로 나아가지 못했다.
독일 제국의 깃발과 지도
제국의 국기는 흑·백·홍 삼색기(Schwarz-Weiß-Rot)였다. 검은색과 흰색은 프로이센의 상징색에서, 붉은색은 한자동맹 도시들의 상징색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깃발은 1871년 제국 성립과 함께 공식 채택되어 제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사용되었다.
영토 측면에서 제국은 북해와 발트해 연안에서 알프스 산맥 기슭까지 뻗어 있었다. 25개 구성국(왕국 4개, 대공국 6개, 공국 5개, 후국 7개, 자유도시 3개)과 제국직할령 알자스로렌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으며, 수도는 베를린이었다. 1871년 프랑스로부터 할양받은 알자스로렌을 비롯해 오늘날 폴란드 서부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구 동프로이센) 지역까지 포함했으며, 1914년 기준 인구는 약 6,800만 명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