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에는 낭만적·이념적 이유로 만들어져 굳어진 신화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혁명기의 '민중 군대'가 구체제(Ancien Régime)의 어둠에 맞서 유럽 여러 나라를 연파했다는 이야기다. 이 통설에 따르면, 자유의 기치 아래 결집한 프랑스 의용병들이 옛 부르봉 왕정군의 정규병들과 합세해, 완고한 진형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적을 향해 밀집 종대로 돌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사실인 면도 있지만, 특히 프로이센군처럼 우수한 산병을 보유하고 훈련 수준이 높았던 군대를 상대로는 통하지 않았다. 프랑스가 우위를 점한 데에는 전혀 다른 원인들이 있었다. 주목할 점은 프랑스 혁명 정부가 1792년 사실상 유럽 전역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 즉 소위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모젤군의 진격: 25,000 대 7,000
1793년 가을, 프랑스 모젤군(Moselle)은 독일 영토, 그러니까 팔츠(Pfalz) 지방으로 진입했다. 이 군단을 지휘한 것은 유명한 장군 루이 라자르 오슈(Louis Lazare Hoche)였다. 프랑스군은 세 개 사단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오슈 자신이 이끄는 최대 규모의 사단(약 25,000명)은 당시 작은 마을이던 비징엔(Biesingen)으로 향했다. 비징엔은 오늘날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바르츠발트(검은숲) 인근에 위치한 곳이다.
그런데 이 진격로를 막고 있는 것은 겨우 7,000명 규모의 프로이센군이었다. 지휘관은 프리드리히 아돌프 폰 칼크로이트(Friedrich Adolf von Kalckreuth) 장군. 그는 불과 15세에 프로이센군에 입대해 7년전쟁까지 몸소 경험한 베테랑이었다. 칼크로이트는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다. 프로이센군 중앙은 힐스더 고지에 진지를 구축했고, 우익은 블리스 강 동안에, 좌익은 힐스더 숲에 배치했다. 하지만 전력 차는 4:1로 프랑스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1793년 11월 17일, 첫 충돌
11월 17일,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진영 앞에 도달해 공격을 개시했다. 처음에 프랑스 포병대는 프로이센 중앙을 향해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동시에 한 개 프랑스 대대가 블리스카스텔(Blieskastel) 부근에서 블리스 강을 도하해 프로이센 우익을 측면에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이 공격을 격퇴하고 오히려 추격에 나섰다. 한편 롬바르(Lombard) 장군은 자신의 사단을 이끌고 프로이센 좌익을 공략하기 위해 움직였다.
롬바르의 병사들은 프로이센 좌익을 우회하기 위해 힐스더 숲을 통과했다. 그러나 삼열 횡대라는 고전 진형을 갖춘 프로이센군은 다가오는 프랑스 밀집종대를 기다렸다가 일제 사격과 강력한 돌격으로 갈아버렸다. 전투 직후 프로이센군은 착검한 총을 들고 횡대 진형 그대로 돌진해 프랑스군을 궁지로 몰았고, 부상당한 앙투안 드 상 롬바르 장군마저 포로로 잡으며 프랑스군을 망신스럽게 패주시켰다.
기병 돌격의 실패
전황을 뒤집기 위한 새로운 시도로, 오슈는 3,000명의 기병을 볼페르스하임(Wolfersheim) 마을 방면으로 보내 프로이센 전선을 둘로 갈라놓으려 했다. 프로이센군은 두 번에 걸쳐 프랑스 기병의 공격을 격퇴했다. 세 번째 공격에서 프랑스군은 마침내 프로이센 전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프로이센군은 신속히 재편성되어—밀집종대도 방진도 아닌 횡대 진형 그대로—정예 저격병 '예거(Jäger)'와 일반 보병대대 산병들의 조준 사격으로 프랑스군을 크게 타격하고, 총검 돌격으로 패주시켰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우익을 향해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번 역시 실패로 끝났다. 연이은 참패 끝에 오슈는 총 1,000명(전사·부상·포로)의 손실을 내며 후퇴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의 손실은 전사·부상을 합쳐 단 160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칼크로이트는 프랑스군의 압도적 물량 우위를 상대로 무한정 버틸 수 없음을 알고 카이저스라우텐(Kaiserslautern)으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11월 28일 프랑스군을 다시 한 번 격파하게 된다.
비징엔 전투가 남긴 교훈
비징엔 전투는 '횡대(리니어) 전술'이 결코 파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영국군은 프랑스와의 전쟁 내내 횡대 전술로 싸워 극소수의 패배만을 기록하며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프랑스 혁명군의 승리 신화 뒤에는 이렇듯 간과된 전술적 현실이 숨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