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독립은 오랜 투쟁의 역사를 거쳐 1947년 8월 15일 마침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물러나는 영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분열된 땅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
인도는 오래전부터 주변 민족들에게 매력적인 땅이었습니다. 풍부한 자원과 비옥한 토지는 끊임없이 침략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수천 개의 민족 집단이 서로 다른 종교와 언어로 나뉘어 살았고, 사회를 엄격한 위계로 묶는 카스트 제도까지 더해져 사회 구조는 매우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16세기 무슬림 무굴 제국과 유럽 세력이 도착하면서 이 대륙의 운명은 크게 바뀌게 됩니다. 1600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인들이 교역을 목적으로 인도에 도착했고, 한 세기 뒤에는 이미 봄베이(뭄바이), 마드라스(첸나이), 캘커타(콜카타)에 거점을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도 이 지역 장악을 시도했으나 1755년 영국에 의해 축출되었습니다. 이후 영국은 펀잡과 델리 지방을 차례로 병합하며 스스로를 '인도의 지배자'로 선언해 나갔습니다.
다만 식민 지배가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세포이 항쟁과 같은 저항이 이어졌고, 1877년에야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황제'로 공식 선포되면서 완전한 식민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이후 영국의 각종 제도가 인도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남녀 모두를 위한 학교와 대학, 우편·전신 서비스, 철도, 귀족 클럽 등이 그 예입니다. 또한 영국은 자국 언어인 영어를 가져왔는데, 이는 200개가 넘는 방언이 공존하던 인도에 공용어라는 접점을 만들어준 결과도 낳았습니다.
실제로 영국 지배기의 인도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수도 뉴델리를 중심으로 영국이 직접 통치하던 인도
- 각각 귀족 가문이 영토를 완전히 지배하던 565개의 번왕국으로 이루어진 인도
마하라자, 라자 등 번왕들은 영국의 힘에 경외심을 품었고, 영국이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국방과 외교 권한을 영국에 넘겨주었습니다.
종교의 다양성
인도에는 브라만교, 자이나교, 불교, 시크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해 왔습니다. 그중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다수를 이루었으며, 두 종교는 서로 완전히 다른 전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무굴 제국 시절 엘리트층이었던 무슬림들은 영국을 자신들의 교육 체계와 종교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반면 힌두교도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아들였고, 식민 행정부의 관료로 참여하며 영국 지배의 기둥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고대 인도
- 인도의 카스트 제도
- 인도 문화
독립 운동의 시작
네루와 간디: 인도 독립을 이끈 두 지도자
그러나 힌두 엘리트들이 받은 영국식 교육은 양날의 검이 되었습니다. 영국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야말로 자신이 통치자를 위해 일하며 같은 민족을 배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1885년 영국 자유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인도 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영국의 지배에 본격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변호사 출신의 간디와 같은 지도자가 등장해 전국을 순회하며 영국에 대한 비폭력 혁명을 설파했습니다.
독립 운동 내부에도 입장 차이는 있었습니다. 일부는 최소한의 자치권만 얻어 대영제국의 일원으로 남기를 원했습니다. 반면 네루와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당은 식민주의는 반드시 끝나야 하며 인도는 완전한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비폭력 저항의 시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 지배의 모순은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이에 간디는 세 차례의 대영국 운동을 주도합니다.
- 1919년 — 교통, 청소 등 여러 산업 분야가 동반 참여한 총파업
- 1920년~1922년 — 평화적 저항: 투표 거부 등 영국 당국과의 협조 전면 중단
- 1930년~1934년 — 시민 불복종: 법을 의식적으로 어기는 운동. 가장 유명한 것은 '소금 행진'으로, 간디는 추종자들과 함께 간석지에서 소금을 채취해 팔았습니다. 이는 인도인에게 금지된 행위였기에 간디는 체포되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의 대가로 간디는 다른 인도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 여러 차례 감옥살이를 겪었습니다. 그중에는 훗날 독립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되고 정치 가문의 기반을 마련한 네루도 있었습니다.
분단과 독립 선포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인도인과 영국 사이의 균열은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영국 정부는 인도의 독립이 시간문제임을 자각하고 협상에 의한 철수를 결정합니다. 인도의 탈식민화는 전쟁 이후 식민주의가 국제적으로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주도하기 위해 영국 귀족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이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독립을 앞두고 인도 내부에는 두 개의 큰 흐름이 형성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간디가 옹호한 단일 인도 국가 구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이끄는 무슬림 진영의 요구로,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의 별도 독립국 건설을主张했습니다. 자율성을 지니던 번왕국들은 어느 국가에 속할지 스스로 선택해야 했습니다.
결국 영국의 지지를 받은 분단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무슬림이 미래의 파키스탄을 향해 고향을 떠났고, 반대편에서는 힌두교도들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두 이주 행렬이 마주치는 일이 드물지 않았고, 잦은 도발은 폭력적인 충돌로 번지며 나라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공식적으로 영국은 인도의 독립일을 8월 15일로 정했지만, 인도인들은 이 날짜가 그렇게 중대한 사건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결국 독립은 8월 14일 밤부터 15일로 넘어가는 시점에 선포되었습니다.
무슬림과 연대한 통일 인도를 끝까지 옹호한 간디는 1948년 급진 힌두교도의 총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한편 네루는 총리로 선출되어 1947년부터 1964년까지 재임하며 인도 정치史上 최장기 집권 기록을 세웠습니다.
결론: 독립 이후의 인도
독립 인도의 지도: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가 주황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오늘날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인구는 수천 개의 민족, 종교, 언어로 이루어진 매우 다채로운 구성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여전히 영국이 남긴 문제들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대립하는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국경 분쟁이 대표적이며, 1960년대에는 중국도 이 분쟁에 개입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라는 독립국으로 분리되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 카슈미르 분쟁
- 아시아의 제국주의
- 빅토리아 시대
- 브릭스(BR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