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1차 페르시아 전쟁: 마라톤 전투와 아테네의 승리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이란?

제1차 페르시아 전쟁(메디크 전쟁)은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 본토에 대해 벌인 첫 번째 침공을 가리킨다. 기원전 493년경, 페르시아의 함대와 해군이 그리스 세계를 상대로 한 대원정을 준비하며 규모를 키우고 있을 때, 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피레우스 항구 방벽 건설을 착수하였다.

기원전 492년 봄, 페르시아군은 서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뒤 아시아로 철수했다. 이어 기원전 491년,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에 조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며 침공을 위협했다.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들은 항복을 받아들였으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를 거부하고 페르시아 사절단을 처형해 버렸고, 이것이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로 두 차례의 군사 원정을 파견했다. 첫 번째는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가 지휘한 정복이자 응징 성격의 원정이었고, 두 번째는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가 이끈 그리스 세계에 대한 보복 원정이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는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의 지휘 아래 킬리키아에서 새로운 원정을 준비했다. 그 목적은 기원전 498년 이오니아 봉기를 지원하고 사르디스를 파괴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보복이었다.

페르시아군은 나소스를 점령해 주요 도시를 파괴한 뒤 델로스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다티스는 아폴론 신전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섬의 약탈을 금지하고 300탈렌트의 헌물을 바친 후 에레트리아를 파괴했다.

또한 페르시아군은 이미 노년이 된 아테네의 전직 참주 히피아스를 대동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를 권좌에 복귀시켜 아테네인들의 충성을 확보하려는 뚜렷한 의도였다.

밀티아데스는 아테네가 포위 공격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에클레시아(민회)를 설득해 페르시아군과의 결전을 결의하게 했고, 스파르타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아마도 아테네군의 공격이 늦어진 탓에 페르시아군은 기병을 함선에 태우기 시작했다. 이로써 전력이 약화된 페르시아군은, 부대의 신속한 기동과 밀티아데스의 뛰어난 전술 덕분에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군에게 패배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마라톤 전투이다. 스파르타의 지원군은 전투가 끝난 다음 날에야 도착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4,000명이 넘는 페르시아 병사가 전사한 반면 아테네군의 희생자는 폴레마르코스(군사 집정관)를 포함해 단 192명에 불과했다.

마라톤 전투

이 전투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별도의 문서인 '마라톤 전투'를 참고하기 바란다.

마라톤 전투의 결과

마라톤 전투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거둔 첫 번째 승리였으며, 그 파장은 결정적이었다.

  •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와 제도에 대한 큰 자신감을 얻었다.
  • 특정 사회 계급과 연결된 호플리테스의 전투 방식이 아테네 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 이 전투를 끝으로 폴레마르코스가 군의 최고 지휘관로 등장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마라톤의 승리에 대한 기억은 아테네인들에게 영광스러운 시대의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이 전투에 참전한 전사들은 조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전사자들은 그 평야에 완전한 예우를 갖춰 안장되었고, 그 무덤은 언덕 형태의 기념비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생존자들에게는 아테네 단독으로 승리한 페르시아와의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최고의 영예로 여겨졌다.

두 전쟁 사이의 10년

기원전 490년부터 480년까지의 시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기록이 많지 않지만, 이 시기의 사회적·정치적 변화는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었다.

밀티아데스

그리스는 마라톤의 승리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밀티아데스는 1년 뒤 키클라데스 제도에 해상 방어선을 구축하고 아테네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원정을 통해 전쟁을 계속 수행할 것을 제안했지만,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4개월 만에 아테네로 돌아왔다.

중상을 입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밀티아데스는 적대 세력으로부터 아테네 시민들을 기만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특히 페리클레스의 아버지인 크산티포스가 반대파의 선봉에 섰다.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어 50탈렌트의 벌금형을 받았고, 이 벌금은 그의 아들 키몬이 그의 죽음 이후에 납부했다.

테미스토클레스 (기원전 약 525~460년)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88년 밀티아데스가 죽은 뒤 권력을 장악하여 당대 아테네 정치의 확고한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군사 및 제도 분야에서 아테네에 중요한 개혁을 주도했다. 대표적으로 함대 건설을 통해 아테네인들을 해양 민족으로 탈바꿈시켰는데, 인구 조사상 제4계급인 테테스(thêtes)가 노젓꾼으로 복무하게 되면서 그동안 호플리테스가 누려오던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울러 제도 개혁도 단행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제도 개혁

그는 또한 제도의 민주화를 목표로 일련의 개혁을 실시했다.

집정관(아르콘) 제도

  • 부족당 50명씩 총 500명의 후보 중에서 추첨(제비뽑기)으로 집정관을 선출하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 제2계급인 히페이스(기사 계급)도 집정관직에 임명될 수 있게 되었다.
  • 폴레마르코스는 더 이상 군의 최고 사령관 역할을 하지 않게 되었다.

스트라테고스(장군) 제도

  • 스트라테고스는 군 지휘관에서 재정 관리자로 역할이 변경되었다.
  • 군사 업무는 10개 부족별 연대(탁세이스)를 지휘하는 10명의 탁시아르코스에게 넘어갔다.
  • 이 직위는 연임이 가능했기 때문에 개인이 장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며,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를 활용했고, 이후 페리클레스 같은 중요 정치인들도 이를 통해 지배력을 연장했다.

도편 추방제(오스트라키즘)의 시행
도편 추방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정파 간 정치 투쟁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며, 귀족 세력에 대한 박해가 두드러졌다.
실제로 여러 인물들이 도편 추방을 당했다. 피시스트라티드 가문 출신의 히파르코스(기원전 487년), 알크메오니다이 가문의 메가클레스(기원전 486년)와 크산티포스(기원전 484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리시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테이데스(기원전 483년)가 그들이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침공이 임박하자 도편 추방제는 중단되었고, 이 제도로 추방되었던 인들조차 소환되었다. 크산티포스와 아리스테이데스는 제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장군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