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조제프 푸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관통한 '경찰 장관'

오트랑트 공작 조제프 푸셰

조제프 푸셰(Joseph Fouché), 오트랑트 공작(Duc d'Otrante)은 1759년 5월 21일 르 펠르랭(Le Pellerin)에서 태어나 1820년 12월 26일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로, 프랑스 혁명부터 나폴레옹 제정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정치가이자 전설적인 경찰 장관입니다.
조제프 푸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관통한  경찰 장관

혁명가로서의 시작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는 낭트(Nantes) 오라토리옹 수도회의 교육 감독관으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물결에 열정적으로 동참했고, 1792년 낭트시의 선출로 국민공회 의원이 되어 공공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처음에는 지롱드파 소속이었으나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표를 던진 뒤 산악파(Montagnards) 의석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비기독교화 운동과 리옹의 참화

1793년 니에브르(Nièvre)와 코트도르(Côte-d'Or) 지역에서 그는 비기독교화 운동의 지도자이자 귀족 탄압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국민공회는 콜로 데르부아(Collot d'Herbois)와 함께 그에게 리옹 봉기의 진압을 명령했고, 그는 그곳에 공포정치를 실시했습니다. 리옹 시 파괴를 명하는 법령의 집행 책임을 맡았던 그는 당시 자행된 잔혹 행위에 깊이 연루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단두대가 '너무 느리다'고 여겨지자 산탄포(grapeshot) 발사로 반군들을 집단 처형했고, 이 때문에 '리옹의 기관총 사수(mitrailleur de Lyon)'라는 악명 높은 별명을 얻게 됩니다. 공포정치가 물러간 후에는 오히려 콜로 데르부아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들었습니다.

경찰 장관으로서의 부상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국민공회에서 축출되었지만 바라스(Barras)의 보호를 받았고, 열월 9일 쿠데타(9 Thermidor)의 핵심 지지 세력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1799년 6월 18일(프뤼리오즈 30일) 쿠데타 이후 바라스에 의해 경찰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어떠한 경찰 개입도 감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비범한 활동력과 희귀할 만큼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때 아무런 제지 조치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그에게 은혜를 입혔습니다. 제1집정 나폴레옹은 그의 청렴함을 결코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경찰 장관직에 계속 유임시켰습니다.

실각과 복권

그러나 1802년 9월 13일(과열매기 10년 26일), 평생의 숙적 탈레랑(Talleyrand)과 보나파르트의 형제들에게 공격받아 해임되고 경찰부는 해체되었습니다. 다만 피셰그뤼(Pichegru), 모로(Moreau), 앙기앙 공작(Duc d'Enghien) 체포 작전에는 여전히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보상으로 나폴레옹은 그에게 상원 의석(엑스(Aix) 상원 구역)과 120만 프랑의 특별 수당을 내주었습니다.

1804년 7월 그는 다시 경찰 장관에 임명되어 1810년 6월까지 재직했습니다. 1808년에는 제국 백작, 1809년에는 오트랑트 공작에 올랐으나, 영국 장관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와의 강화 회담을 추진하려다 또다시 실각하고 말았습니다.

일리리아 총독 시절

러시아 원정 이후 은혜를 되찾은 그는 1813년 통치가 매우 어려운 일리리아 속주(Illyrian Provinces)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부임 후 그는 절제된 통치를 펼쳤습니다. 농노제의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지방 유력자들을 위한 연회를 열며 주민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 총독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도착하기 며칠 전까지 라이바흐(Laybach, 현 류블랴나)에 머물며 주민들에게 걱정할 것이 없다고 설득하다가, 마지막 순간에야 그곳을 떠났습니다.

배신과 백일천하

1814년 그는 조아킴 뮈라(Joachim Murat)와 함께 황제를 배신했고, 제국 패망 후 파리에서 아르투아 백작(훗날 샤를 10세)에게 왕국 섭정직을 제안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백일천하(Hundred Days) 기간에는 다시 경찰 장관에 임명되었고, 워털루 패전 후에는 임시정부 의장이 되어 연합국과 협상을 벌였습니다. 1815년 7월 9일 루이 18세의 내각에 입각했으나, 왕은 그를 정리하기 위해 드레스덴 주재 대사로 임명해 멀리 보냈습니다.

샤토브리앙이 목격한 굴욕의 순간

"폐하께 알현하러 갔습니다. 왕의 방에 이르는 방 하나에 들어섰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구석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문득 문이 열립니다. 죄악(Crime)의 팔에 기대어 부패(Vice)가 조용히 들어옵니다. 탈레랑 씨가 푸셰 씨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것입니다. 저 악마적인 환영은 천천히 제 앞을 지나 왕의 서재로 들어가 사라졌습니다. 푸셰는 주군에게 충성과 경의를 맹세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루이 16세의 목을 잘라내게 만든 그 두 손이, 순교왕의 동생의 손안에 무릎 꿇고 놓였습니다. 배교한 주교가 그 맹세의 보증인이 되었습니다." —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무덤 너머의 회상(Mémoires d'outre-tombe)』

추방과 최후

1816년 1월 12일 칙령에 따라 루이 16세 사형에 찬성한 죄, 즉 왕살해죄(régicide)로 몰린 그는 추방당해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1820년 트리에스테의 망명지에서 생을 마쳤는데, 임종을 지켜본 이는 제롬 보나파르트(Jérôme Bonaparte) 왕자였습니다. 그는 푸셰의 명령과 감독 아래 그의 모든 서류를 5시간 동안 불태웠고, 이로써 총정부·집정정부·제1제정의 비밀 역사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유해는 1875년에야 프랑스로 돌아와 페리에르앙브리(Ferrières-en-Brie)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