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말만 하더라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1968년 초 시작된 테트 공세(Tet Offensive)는 압도적인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베트남 주둔이 서서히 축소되는 긴 여정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테트 공세 개요
누가: 월맹(북베트남) 정규군과 베트콩 약 8만 명이 남베트남군 150만 명 이상 및 주월 미군과 충돌했습니다.
어떻게: 공산 세력이 남베트남 전역의 도시 지역과 군사 기지를 겨냥해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습니다.
어디서: 북쪽 비무장지대(DMZ) 연선의 군사 기지부터 남쪽 메콩 델타까지 남베트남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언제: 1968년 1월 29일부터 4월 8일까지.
왜: 월맹은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대중 봉기를 일으켜 전쟁 국면을 뒤바꾸려 했습니다.
결과: 월맹군과 베트콩에게 완전한 군사적 패배로 끝났습니다.
배경
1965년부터 1967년 말까지 미군의 핵심 전략은 주월미군사원조사령부(MACV)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1914~2005) 장군이 구축한 '수색 섬멸(Search and Destroy)' 작전이었습니다. 이는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을 바탕으로 월맹군(NVA)과 베트콩(VC)의 인명 손실을 극대화하여, 병력 소모로 인해 북베트남이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시키려는 소모전 방식이었습니다.
1967년 말, 월맹군과 베트콩의 피해가 극심하여 장기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우세했고, 이에 따른 낙관론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무장지대 북쪽의 호치민(1890~1969)과 그의 군사 지휘관 보 응우옌 잡 장군 역시 같은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급진적인 전략 전환을 결심합니다. 소모적인 게릴라전을 계속하는 대신, 남부에서 전면 공세에 베팅한 것입니다.
테트 공세는 미군이나 남베트남군(ARVN)을 정면 교전으로 격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목표는 남부 내부에서 통제 불가능한 대중 봉기를 일으켜 남베트남군의 역량을 무너뜨리고, 미국의 항복을 강제하며, 정권 교체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성공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잡 장군은 베트남 최대 명절인 테트(설날) 연휴 기간에 공세를 개시하기로 했습니다. 베트콩은 이미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휴전을 선언한 상태였고, 이로 인해 수많은 남베트남 병사들이 가족을 만나러 고향에 갈 수 있었으며 남부 방어선 전체의 경계 태세도 크게 느슨해졌습니다. 공세의 주 타깃은 남베트남의 대도시권이었기 때문에, 그 전에 월맹군은 미·남베트남군을 농촌 지역으로 유인하는 예비 작전을 펼쳤습니다. 1968년 1월 21일에는 북부 미 해병대 기지 케산(Khe Sanh)에 대한 포위 작전이 시작되었고, 닥토(Dak To) 일대의 전투도 병력을 도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미군 내부에도 공세 준비 움직임에 대한 의심이 있었지만, 월맹군과 베트콩은 결국 남베트남 전역에 84,000명의 병력과 수천 톤의 물자를 은밀히 침투시키며 공격 준비를 마쳤습니다.
전역에 퍼진 대공세
1968년 1월 29일~30일 테트 공세가 개시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캠페인이 아니라 수십 건의 동시 작전이었습니다. 44개 성도 중 36개, 자치시 5개, 군청 소재지 72곳, 군사 기지 23곳이 로켓포, 박격포, 야포 공격을 받았고, 이후 월맹군 정규 부대나 베트콩 돌격대가 대대 또는 사단급 규모로 추가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미국 정부에 가장 큰 심리적 충격을 안겨준 것은 사이공 공격이었습니다. 무려 적군 35개 대대가 도시를 공격했고, 베트콩 특공대는 폭약으로 미국 대사관 부지를 돌파해 안뜰에서 헌병 경비대와 무려 6시간 동안 화기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 총격전은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베트콩 공격대원들이 전원 사살되고(미군 5명도 전사) 작전은 실패했지만, TV를 통해 생중계된 영상은 미국 여론이 갖고 있던 '자국 정부의 무적'이라는 믿음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습니다.
사이공 내 다른 요충지들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MACV 사령부와 남베트남군 총참모부, 대통령궁이 표적이 되었고, 미·남베트남 해군 사령부, 한국·필리핀 대사관, 국영 라디오 방송국도 공격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방송국에서는 베트콩 15명이 방송국을 점거하고 남베트남 전역에 혁명 선전문을 방송하며 지원군 도착을 기다렸으나, 정부측 기술진이 방송국과 송신기 사이의 회선을 차단하면서 계획은 좌절되었고, 결국 지원군이 도착하지 못한 채 이들은 전멸했습니다.
사이공은 테트 공세의 중심일 뿐이었습니다. 메콩 델타부터 북부의 꽝찌(Quang Tri)와 랑비(Lang Vei) 기지까지,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월맹의 점령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승패의 추세는 빠르게 기울었습니다. 미·남베트남 연합군은 대부분의 지역 공격을 3~4일 안에 진압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무능한 모습을 보였던 남베트남군은 새로운 전문성을 갖춘 부대로 거듭나고 있었고, 미군의 훈련과 함께 고향과 가족을 지키려는 열망이 그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점령 지역에서 목격되는 월맹군과 베트콩의 잔혹 행위에 대한 증거가 늘면서, 남베트남 병사들은 포로가 되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했습니다. 무엇보다 공산 세력을 지지할 대중 봉기가 전혀 일어나지 않으면서, 테트 공세의 근본 전제는 무너졌고 이것은 공산 진영에 뼈아픈 이념적 충격이 되었습니다.
사이공 일대에서는 2월 4일, 미·남베트남 연합군이 10개 사단의 전투 병력을 집결시켜 도시 탈환을 위한 총반격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근접 항공 지원, 포병, 무반동포의 화력을 앞세운 연합군은 과도할 정도의 화력 논란 속에서도 월맹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나갔습니다.
후에 전투
남베트남 곳곳에서 테트 공세의 불길이 꺼져 갈 무렵, 한 도시에서만은 전투가 2월 25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다낭 북쪽에 위치한 해안 도시 후에(Hue)는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도시 중 하나로, 향강(香江)을 경계로 남쪽의 신도시와 북쪽의 옛 성곽도시 '시타델(Citadel)'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높이 9m, 두께 6m의 외성벽과 내부 벽돌 성벽으로 보강된 이 고도는, 1월 31일 약 8,000명의 공산군이 집중 포격 후 도시 대부분(남베트남군 제1사단 사령부 제외)을 점령하면서 무의미해졌습니다. 후에는 그 상징적인 아름다움 덕분에 테트 이전까지 전쟁의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아 방어 태세가 허술했고, 그 결과 테트 공세 중 공산군이 완전히 점령한 유일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초기에 후에 주변의 미군은 판단이 늦어 소수의 해병 소대만 도시에 투입했고, 이들은 사단급 규모로 방어하는 월맹군에 의해 대부분 격퇴당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미·남베트남군은 도시 탈환을 위한 강력한 반격을 계획했고, 공격 구역을 둘로 나눴습니다. 미 해병대는 신도시를 탈환하고, 남베트남군은 시타델을 공략하기로 한 것입니다. 해병대가 자신들의 구역을 확보하면 향강을 건너 남베트남군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아울러 제1기병사단(공중기동) 제3여단은 2월 2일, 라오스와 후에 사이를 오가는 월맹군의 보급로와 증원을 차단하기 위해 도시 서쪽 10km 지점에 공중 투입되었습니다.
제1기병사단 병력들은 이후 제1공수사단과 현지 남베트남군의 지원을 받으며, 월맹군 3개 연대가 공산군 방어 부대에 합류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후에 시내의 전투가 격화되면서 미·남베트남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훈련 과정에서 등한시되었던 도시전(市街戰)의 참혹한 현실을 몸소 경험하게 됩니다. 신도시에서는 제1해병연대 제1대대와 제5해병연대 제2대대가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겨우 네 개 블록을 전진하는 데 그쳤습니다. 처음에는 도시의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고려해 미군의 대규모 포격이 자제되었지만, 시가전의 막대한 희생이 이어지자 이 정책은 곧 바뀌었고 후에의 파괴가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전투 기간 동안 미군은 도시에 52,000발의 포탄, 7,670발의 함포탄, 600톤의 항공 폭탄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대가는 민간인에게도 참혹했지만, 2월 10일 신도시는 완전히 확보되었습니다.
이후 해병대는 향강을 건너 시타델로 진격했고, 남베트남군 역시 이미 공산군을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남베트남군은 점차 시타델 북부 지역에서 월맹군과 베트콩을 몰아냈고, 마침내 활주로를 탈환한 뒤 2월 24일에는 향강 북안의 옛 황궁을 재탈환했습니다. 저항은 2월 내내 도시 서부 외곽과 자회(Gia Hoi) 지구(공산군이 '사회 개편'이라는 명목으로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곳)에서 계속되었으나, 3월 2일 도시 전체가 연합군의 손에 돌아왔습니다. 후에 전투의 대가는 미군 119명, 남베트남군 363명, 월맹군 정규군 및 베트콩 약 8,000명, 그리고 민간인 약 6,000명이었습니다.
여파
후에 전투의 종결과 함께 테트 공세는 사실상 막을 내렸고, 4월 초 케산 포위전이 끝나면서 전황 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북베트남 입장에서 테트 공세는 재앙적인 실패였습니다. 약 54,000명의 병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남베트남군 11,000명, 미군 2,000명과 비교), 베트콩은 정치·군사 조직으로서 사실상 궤멸했습니다. 게다가 예상했던 대중 봉기가 일어나지 않으면서, 남부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기다리고 있다는 북베트남의 확신마저 흔들렸습니다.
테트 공세는 분명 미국의 군사적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서방 언론은 그렇게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정치가와 지휘관들이 북베트남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안심시켰음에도, 언론은 갈등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는 인상을 퍼뜨렸습니다. 이후 추가 병력 증파 요구가 이어지면서 미국 정치권에도 비상경보가 울렸고, 1969년부터는 전쟁 수행을 남베트남에 이양하는 '베트남화(Vietnamization)' 정책과 단계적인 미군 철수가 미국 정책의 주류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