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베르됭 전투: 제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소모전, '고기 분쇄기'의 비극

베르됭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소모전의 전형적인 원형이 된 전투였다. 프랑스군 예비 병력을 괴멸시키는 것이 목표였던 이 전투는 오히려 독일군 또한 막대한 병력을 끌어들이게 만들었고, 결정적인 결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베르됭 전투 기본 정보

  • 교전 세력: 앙리 페탱(Henri Pétain, 1856~1951) 장군이 지휘하다가 후에 로베르 니벨(Robert Nivelle, 1856~1924) 장군에게 지휘권을 넘긴 프랑스 제2군이, 빌헬름 왕세자(1882~1951)가 이끄는 독일 제5군과 맞섰다. 당시 독일군 총참모장은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 1861~1922)이었다.
  • 진행 과정: 베르됭 시는 포위당했고, 공격측은 막대한 포격으로 적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며 전진했다. 마침내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잃었던 진지를 되찾았다.
  • 장소: 프랑스 뫼즈(Meuse) 강변에 위치한 도시 베르됭.
  • 시기: 1916년 2월 21일부터 12월 18일까지.
  • 원인: 독일 최고사령부는 프랑스군 예비 병력을 '고기 분쇄기'로 유인해 괴멸시키고, 프랑스를 강제로 강화 협상에 몰아넣고자 했다.
  • 결과: 처참한 소모전 끝에 얻은 것은 양측의 막대한 인명 손실뿐이었다.

소모전으로의 전환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 말 참호전 양상으로 변하면서, 적을 상대로 전통적인 의미의 승리를 거두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전까지 승패는 야전에서 군대를 격파하거나, 수도와 같은 중요 지역을 점령(혹은 점령 위협)함으로써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어선을 돌파하고 전략적 목표를 확보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으며, 깊숙하게 구축된 방어 진지 때문에 적을 야전에서 축출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문제의 핵심은 예비 병력의 확보 여부였다. 적이 공격을 성공적으로 활용하기도 전에 위협 지점으로 병력을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한, 전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따라서 대전의 승리는 상대를 소진시키거나, 전쟁 지속 비용을 너무 크게 만들어 평화가 필수불가결하게 되도록 하는 문제가 되었다. 적이 전선에 투입할 병력을 계속 확보하는 한 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독일 최고사령부는 프랑스군 예비 병력을 '고기 분쇄기'로 유인하여 소멸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독일의 계획은 프랑스가 반드시 방어해야만 하는 지점을 공격하여, 포격과 보병 공격으로 프랑스군을 갉아먹는 것이었다. 그 목표물로 선정된 곳이 바로 요새화된 도시 베르됭이었다.

목표 지점, 베르됭

베르됭은 여러 면에서 이상적인 공격 목표였다. 뫼즈 강의 굽이진 곳에 자리한 이 도시는 교통망이 열악했고, 드나들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약 20km 거리에 독일군의 대형 철도 종착역이 있어,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탄약과 물자, 증원 부대를 신속하게 운송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급상의 어려움도 적었다. 베르됭은 전선에서 비교적 한산한 구역에 속했고, 요새들의 중포 다수가 필요한 다른 전역으로 옮겨간 상태였다. 수비 병력은 3개 사단 규모로, 상당히 가벼운 방어 체제였다.
독일군의 공격 계획에는 실제 공격에 투입할 10개 사단 집결이 포함되어 있었고, 77mm 야포를 운용하는 실험적인 '보병 포병대'가 보병과 함께 전진해 직접 화력 지원을 제공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실제로는 폭격으로 초토화된 황무지를 통과하지 못했다. 또 하나의 새로운 무기도 베르됭에서 첫 선을 보였는데, 바로 화염방사기였다. 공격은 1,400문이 넘는 대량의 중포가 지원했다. 그중에는 이전에 벨기에의 요새들을 파괴하는 데 사용되었던 거대한 420mm 및 305mm 포도 포함되어 있었다. 500여 문의 미네발사기(Minenwerfer)도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45.3kg 폭발탄을 발사했으며 참호에 떨어질 경우 치명적인 효과를 냈다. 여기에 참호 박격포 같은 경량 무기들도 함께 운용되었다.
공세의 코드명은 '게리히트(Gericht, 심판)' 작전이었다. 목표는 프랑스군을 불공평한 조건의 소모전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응하지 않으면 베르됭은 함락될 것이고, 버티고 싸우면 군대가 출혈로 소진되어 결국 강화를 청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작전은 원래 2월 10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악천후로 인해 21일로 연기되었다. 작전 준비 과정은 관측되고 있었음에도 프랑스 측은 베르됭 증강에 나서지 않았고, 초기의 포격 세례는 수비군을 기습하는 결과를 낳았다.

포격의 시작

1916년 2월 21일 새벽, 살얼음이 내리앉은 차가운 공기는 중포탄의 포성과 살상용 무기의 폭발음에 산산조각이 났다. 이후 12시간 동안 200만 발이 넘는 포탄이 프랑스군 전방 진지에 쏟아졌고, 그 후 보병 공격이 시작되었다. 첫 이틀 동안 독일군은 상대적으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지만, 24일에는 주 방어선을 돌파해 포로 1만 명과 야포 65문을 노획했다. 보병은 방대한 수의 대포가 쏟아내는 엇갈린 차단사격의 호위 아래 공격에 나섰고, 이 포격은 방어 시설을 파괴하고 생존자들을 은신처로 내몰았다.
압도적인 포격, 기습의 급습, 추위가 겹치면서 프랑스군은 마비 상태에 빠졌다. 일부 부대는 와해되어 후방으로 도주했고, 이렇게 생긴 방어선의 빈틈으로 독일군 돌격 부대가 진입했다.
베르됭은 원래 무적의 요새로 여겨졌다. 1915년 프랑스 군사위원회가 이를 확인해 주기까지 했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한 장군은 해임되었다. 그러나 2월 25일, 도시 방어의 핵심 요소인 두오몽(Douaumont) 요새가 독일군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이것은 프랑스군의 사기에 심각한 타격이었지만, 사실 수비대가 완전히 차감되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일이었다. 수비 보병은 포격에 와해되어 있었고, 요새를 지키는 것은 포수 소대 하나가 전부였다. 9명으로 구성된 독일 순찰대가 요새 입구를 발견하고 그곳이 사실상 무방비 상태임을 확인한 뒤, 동료 300명을 안으로 인솔하여 단 한 발의 총성 없이 베르됭 방어의 핵심을 손에 넣었다.

페탱, 지휘권을 잡다

적이 두오몽 요새를 함락시키던 바로 그때, 페탱 장군이 베르됭 방어의 지휘를 맡기 위해 도착했다. 그가 마주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도시로 이어지는 보급로는 하나의 고속도로와 그 옆의 협궤 철도가 전부였다. 라 부아 사크레(La Voie Sacrée), 즉 '성스러운 길'이라 불린 이 도로는 베르됭의 생명줄이었고, 페탱의 첫 번째 과제는 이 도로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인력이 도로 확폭 작업에 동원되었다. 작업이 완료되자 하루 약 6,000대의 트럭이 이 도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50만 명이 넘는 병력이 모든 보급품과 함께 이 길을 통해 도시를 오갔다. 페탱은 부대들이 참호에서 15일씩만 근무하도록 하여 휴식과 재정비 시간을 확보했다. 그리하여 라 부아 사크레에는 전선을 오가며 순번을 돌아가는 부대들의 끊임없는 행렬이 이어졌다. 페탱이 보급 상황을 개선하기는 했지만, 정세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전투는 2월 말 잦아들었다가 3월 5일에 재개되었다.

독일군의 재공세

독일군의 새로운 공세는 뫼즈 강 서안을 따라, 완벽하게 준비된 방어선을 향해 감행되었다. 페탱은 이 공격에 맞서 최정예 병력을 배치했고, 이들은 강력한 포병 화력 집중의 지원을 받았다. 이 공격은 베르됭 방어의 일종의 전환점이 되었다. 프랑스 포병은 공격 부대에게 처참한 피해를 입혔을 뿐 아니라, 적 포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포병 사격도 가했다. 4월 중순까지 독일군의 모든 중포가 무력화되었고, 스픵쿠르(Spincourt) 숲에 저장되어 있던 거의 50만 발에 달하는 중포탄 더미에 포탄이 떨어지면서 독일 포병은 또 한 차례 큰 타격을 입었다.
공격은 4월을 거쳐 5월까지 계속되었고, 실제로 '프랑스군을 출혈로 소진시킨다'는 목표에 근접하는 듯했다. 그러나 전과는 상대적으로 미미했고, 페탱이 로베르 니벨 장군으로 교체되면서 프랑스군은 다시 공격 정신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니벨, 공세로 전환하다

페탱이 베르됭의 수호자로서 함락을 막았다면, 니벨은 공세에 나섰다. 베르됭에서의 프랑스 좌우명은 Ils ne passeront pas!(그들은 지나가지 못한다!)였지만, 니벨의 목표는 단순히 문을 막는 것 이상이었다. 그는 독일군을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초기에 니벨 역시 페탱 이상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독일군의 공격은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두오몽 요새가 독일군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 방어의 핵심은 이제 보(Vaux) 요새였다. 이곳은 고지대를 방어하는 요충지로, 독일군의 포가 도시를 직접 쏠 수 있었으며, 더욱 중요하게는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보급품이 지나가는 다리까지 겨눌 수 있는 곳이었다. 보 요새는 독일군 공격의 표적이 되었고, 6월 7일 함락되었다.
그러나 세력의 균형은 변하고 있었다. 니벨은 포병 장교 출신이었고, 그의 지휘 아래 프랑스 포병은 더욱 효과적으로 변모했다. 독일군이 살아남은 수빌(Souville)과 타반(Tavannes) 요새를 향해 진격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손실은 계속 누적되었다. 전황은 6월 말까지 팽팽하게 유지되었고, 7월 1일 솜(Somme) 공세가 시작되었음에도 독일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고 도시에 점점 가까워졌다. 6월 11일, 공격이 수빌 요새 자체에까지 미쳤으나 이 공격의 실패는 독일군의 베르됭 함락 시도의 종말을 알렸다.
이후 독일군은 방어로 전환했고, 프랑스군의 반격이 잃었던 진지 일부를 되찾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의 반격

니벨의 입지는 베르됭에 가해지는 압력을 줄이기 위해 개시된 솜 공세 덕분에 개선되었다. 솜 공세는 그 자체로는 실패작이었지만, 원래라면 베르됭 수비군을 상대로 돌려질 물자와 증원 병력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압박이 완화되자 니벨은 독일군을 몰아내고 잃었던 요새들을 되찾기 위한 반격을 개시했다. 이 중 가장 큰 반격은 10월 24일 두오몽 요새를 향해 감행된 것으로, 보병 17만 명, 야포 700문, 항공기 150여 대가 동원되었다. 이후 프랑스군은 서서히 전진하며 11월 초 보 요새를 탈환했다. 12월 중순,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철수했고, 도시의 남은 부분은 프랑스의 손에 남았다.

'고기 분쇄기'의 대가

베르됭 공세가 끝날 무렵, 독일군은 프랑스군에게 무려 55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이는 자국군 45만 명의 손실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얻어낸 결과였다. 그 희생자 중 하나는 팔켄하인 장군의 군인 생명이었다. 8월 29일, 그는 전날 연합군에 가입한 루마니아군과 싸우는 부대의 지휘를 맡기 위해 전보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강등이었다. 팔켄하인의 뒤를 이은 것은 힌덴부르크(Hindenburg)였으며, 루덴도르프(Ludendorff)가 군수총장으로 보직되었다. 팔켄하인에게 상황의 책임을 묻는 것은 어쩌면 불공평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3월경부터 그는 손실이 너무 커질 것을 예감하고 작전 종결을 추진했지만, 빌헬름 왕세자가 계속 진행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독일의 초기 계획 자체는 타당했다. 적이 반드시 방어해야 하는 지점을 공격하고, 포격으로 그 자원을 소진시킨 뒤, 유린당한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임무의 변질'이라는 함정에 빠져, 어느 시점부터는 베르됭의 함락 자체가 작전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이는 원래 계획이 아니었고, 베르됭은 50만 병사의 가치가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전투가 전개되면서 목표는 계속 변질되었고, 결국 독일군은 정작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던 도시 하나를 차지하려다 스스로 소진되고 말았다. 그 결과 초래된 손실은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불필요한 것이었다.

전투의 여파

서부 전선의 거의 모든 프랑스 사단이 베르됭의 고기 분쇄기를 거쳐갔다. 독일군 편제 역시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부대가 공세에 교대로 투입되었다. 양측의 막대한 손실은 양군의 전투력과 사기를 저하시켰고, 베르됭의 절박한 상황은 연합군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솜 공세를 강행하도록 만든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이 공세 역시 양측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인명 손실을 안겨주었다. 독일군이 베르됭을 점령하지 못한 것은 연합군 측에 사기 진작 효과를 가져왔고, 솜 공세 역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독일군은 1917년 힌덴부르크 방선으로 후퇴했다.
베르됭과 솜에서 발생한 막대한 손실은 1917년 프랑스군 사기 붕괴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영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지휘관들에 대한 냉소와 불신이 커지는 배경이 되었으며, 1916년의 격전에서 최고의 젊은 지휘관들을 잃은 독일군의 쇠퇴에도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