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한 장난을 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실존 인물이 있다. 바로 한국인 청년 양경종(Yang Kyoungjong)이다. 그는 1938년부터 1944년까지 불과 6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일본군, 소련군, 독일군이라는 세 개의 군대에서 차례로 복무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격랑 속을 떠밀려 다녀야 했다.
일본 제국 육군의 강제 징집
1938년, 한반도는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시대를 겪고 있었다. 일본은 중국과 만주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젊은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병했다. 당시 18세였던 양경종은 공부하러 서울로 가던 중 일본 제국 육군에 끌려 들어갔다. 일본은 한국인을 '충성스러운 일본 신민'으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강압적인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르킨골 전투, 소련군의 포로가 되다
1939년, 양경종은 소속 부대와 함께 몽골-만주 국경 지역의 하르킨골(Halkin Gol)에서 소련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소련군의 맹렬한 전차 공격 앞에 그의 연대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그 자신도 다른 동포들과 함께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소련의 포로 수용 조건은 비인간적이었다. 소련은 이들을 '일본 파시스트'로 간주했고, 수많은 포로들이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
'한국 민족의 아들'로 재탄생하다
그 무렵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전세는 급변했다. 1942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앞까지 진격했고, 이를 막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소련의 손실은 어마어마했고, 싸울 수 있는 모든 남성을 최전선에 내보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렸다.
바로 그때 소련은 한국인 포로들을 떠올렸다. 하룻밤 사이에 이들은 '일본 파시스트'에서 '한국 민족의 싸우는 아들들'로 재분류되었고, 붉은 군대에 입대해 독일군과의 전투에 뛰어들었다.
하리코프에서 다시 포로로
양경종은 붉은 군대 소속으로 약 1년간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1943년 초, 우크라이나의 하리코프(Kharkiv)에서 이번에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1944년, 막대한 손실을 입은 독일군은 아시아 출신 포로들로 경비 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해 프랑스 해안 방어 임무를 맡게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그리고 마지막 항복
예상대로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D-Day)이 개시되었고, 양경종은 이번에는 미군과 맞서야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싸울 의욕이 없었던 그는 코탕탱 반도로 진격해 오던 미국 공수부대에게 첫 기회를 삼아 항복했다.
전후의 평온한 삶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양경종은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 머물렀다. 종전 후 그는 미국으로 이민하여 일리노이주에서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으며, 1992년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의 운명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얼마나 험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양경종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전쟁의 부조리함을 일깨워 주는 살아있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