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연방 국가로 탄생했다. 그러나 독립을 원하던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 슬로베니아인들의 반발은 거셌다. 특히 크로아티아에서는 독립운동이 급격히 극단주의 형태로 변질되었고, 악명 높은 우스타샤(Ustaše)의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가 그 선두에 섰다.
달마티아 지방을 노리고 유고슬라비아 분할을 꿈꾸던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우스타샤는 1934년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드르 국왕을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이탈리아 후원 아래 탄생한 ‘독립 크로아티아’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유고슬라비아군에 복무하던 크로아티아인 병사들은 집단 탈영하거나 독일군 진영에 합류했다. 그 대가로 1941년 4월,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독립 크로아티아 왕국’의 건국에 합의했다. 왕위에는 이탈리아 국왕의 조카가 앉혔고, 총리 자리는 광신도 파벨리치가 차지했다.
파벨리치가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추기경 알로이지우스 스테피나츠(Aloisius Stepinac)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가톨릭 교회와의 긴밀한 협력 아래 새 크로아티아 영토에 살던 200만 명의 세르비아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945년 초까지 이어진 이 박해는 아틸라의 훈족 시대나 종교재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으며, 오히려 아틸라와 종교재판관 쪽이 더 자애롭다고 묘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바티칸의 방관, 그리고 내부자의 증언
우스타샤는 스테피나츠의 축복 아래, 최소한 바티칸의 묵인 속에서 세르비아인들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만행을 자행했다. 극단주의에 물들지 않은 크로아티아인들조차 이런 잔혹함을 견딜 수 없었다. 정치인 프르보슬라브 그리고고노(Prvoslav Grizogono)는 1942년 스테피나츠 추기경에게 학살 중단을 위해 개입해 달라고 호소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고노는 서신에서 이렇게 적었다. “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은 크로아티아 독립국 수립 첫날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포는 단순한 살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살은 모든 것, 모든 사람을 덮칩니다. 노인, 여자, 아이에게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사바 강과 드라바 강, 다뉴브 강과 그 지류들은 수천 구의 세르비아인 시신을 실어 날랐습니다…”
“밀레바 보지니치(Mileva Božinić)의 사건은 특히 끔찍합니다. 그녀의 배 속에서 아이가 찢겨 나갔습니다.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인의 머리를 통째로 굽는 일도, 세르비아인의 피로 가득 찬 그릇도, 살해당한 친척의 뜨거운 피를 마시도록 강요당한 세르비아인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정교회의 성역 안에서도 강간이 자행되었습니다. 페트리냐(Petrinja)에서는 한 아이가 어머니를 강간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이 만행들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탈리아인과 독일인조차 이 범죄 앞에서 경악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세르비아인의 눈 3kg 이상이 담긴 용기를, 세르비아인의 눈으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건 크로아티아인을, 두브로브니크 출신의 또 다른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인의 혀들을 허리띠에 매단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유럽 역사에는 이런 유례가 없습니다. 비슷한 상황을 만나려면 아시아로, 타메를란 혹은 징기스칸의 시대로 가야 할 것입니다.” (마르코 아우렐리오 리벨리, 『집단학살 대주교』, 프로스케니오 출판사, 아테네 2000)
가톨릭 사제가 이끈 학살 수용소
세르비아인, 유대인, 롬인을 수용한 최대 규모의 절멸 수용소 야세노바츠(Jasenovac)의 지휘관 역시 가톨릭 사제 미로슬라브 마요스토로비치(Miroslav Majstorović)였으며, 그는 스스로 수백 명을 학살했습니다.
수용소에서는 ‘학살 속도 대회’까지 열렸다. 주어진 시간 안에 가장 많은 사람을 학살한 크로아티아인이 우승하는 방식이었는데, 챔피언은 약 6시간 만에 1,386명의 세르비아인을 학살한 크로아티아인 간수였다.
‘성인’이 된 스테피나츠, 평온한 최후를 맞은 파벨리치
그러나 1998년 바티칸은 스테피나츠를 성인으로 선언했다. 한편 안테 파벨리치는 1945년 바티칸의 보호를 받아 도피했고,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페론 치하의 아르헨티나를 떠돈 끝에, 결국 독재자 트루히요의 보호 아래 산토도밍고에서 평화롭고 풍요롭게 생을 마감했다.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은 끔찍한 고문과 함께 최소 70만 명의 세르비아인, 5만 명의 유대인, 3만 명의 롬인을 절멸시켰다.

파시스트 크로아티아 지도자 파벨리치와 함께한 ‘거룩한’ 추기경.

세르비아인의 참수된 머리와 함께 사진을 찍은 크로아티아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