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미국 독립혁명: 식민지 반란에서 미합중국 탄생까지

미국 독립혁명: 식민지 반란에서 미합중국 탄생까지미국 독립혁명(1775~1783년)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북미 동해안의 13개 식민지 사이에 벌어진 분쟁이었다. 1763년 프랑스를 누르고 세계 최강의 식민 제국으로 부상한 영국은, 신대륙에서 프랑스의 위협이 사라지자 오히려 13개 아메리카 식민지의 충성심을 크게 흔들고 말았다. 과세와 해외 무역 규제는 유럽 본국 지배에 맞서는 저항 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마침내 1776년 13개 식민지는 독립을 선포했다. 이어진 전쟁은 1783년 미합중국(USA) 건국이라는 결과로 끝났다.

미국 독립혁명의 발단

대부분의 영국인에게 식민지는 무엇보다도 잉글랜드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다. 식민지는 본국 산업에 값싼 원자재를 공급하는 동시에 영국 제품의 수출 시장 역할을 했다. 18세기 내내 영국은 다른 나라와의 식민지 무역을 제한하는 법령을 시행했지만, 그 결과는 스페인·프랑스·네덜란드령 서인도제도와의 밀무역만 부추기는 꼴이 되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 기간에는 뉴잉글랜드 상인들이 자체 선박을 대절해 유럽으로 물품을 수출하기까지 했다.

미국 독립혁명: 식민지 반란에서 미합중국 탄생까지그러나 강화 조약이 체결되자 영국 정부는 이런 활동을 막기 위해 세관 통제를 강화했고, 이러한 조치는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만 증폭시켰다. 여기에 남부의 대농장 소유주들은 영국에서 힘을 얻던 노예제 폐지 운동이 플랜테이션 중심 경제를 흔들까 우려하고 있었다.

여기에 1763년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정착을 금지한 '왕실 선언문'도 불만 목록에 추가되었다. 이는 신규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을 대륙 내륙으로 몰아내며 벌어질 충돌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이민 행렬과 연안 식민지의 인구 과잉은 서부 국경에 감당하기 어려운 압력을 가했고, 수많은 정착민들은 그저 법을 무시해 버렸다.

영국의 과세에 맞선 식민지 주민들

7년 전쟁으로 재정이 크게 악화된 영국 정부는 그 부담을 식민지에 전가하기로 결정한다. '인지세법'은 신문과 공식 문서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는데, 이 법은 납세 의무를 진 적이 없던 아메리카 정착민들의 격렬한 분노를 샀다. 그들은 영국산 상품을 불매하고, 13개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 저항 조직화에 나섰다. "대표 없는 곳엔 과세도 없다"라는 구호 아래, 그들은 자신들이 영국 의회에서 발언권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인지세 납부를 거부했다.

미국 독립혁명: 식민지 반란에서 미합중국 탄생까지곧바로 폐기된 인지세법은 거의 즉각 차·유리·납·페인트·종이에 대한 관세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부는 불매 운동에 굴복해 홍차세를 제외한 모든 부과금을 철회했다. 시위는 갈수록 격렬해졌고, 나아가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1770년 보스턴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영국군 병사들이 시위대 5명을 살해했는데, 이 사건은 역사에 '보스턴 학살'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충돌들은 식민지 주민들의 반영 감정을 더욱 부채질했다.

1773년 12월에는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한다. 보스턴 시민들로 구성된 집단이 홍차세에 항의하며 선적된 차를 바다에 던져 버린 것이다. 영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련의 징벌 조치, 이른바 '감당할 수 없는 법'을 시행했고, 이는 모든 식민지를 왕실에 맞서 단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는 식민 종주국과의 즉각적인 단절을 외쳤고, 또 다른 이들은 숙청을 최후의 수단으로 여겼다. 1774년 9월, 필라델피아에서 대륙 회의가 열려 식민지의 미래를 논의하게 된다.

미국 독립 전쟁

회의는 처음부터 본국과의 결별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회의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권리를 규정하고, 영국 의회 권력의 한계를 설정하며, 강압적인 법에 대한 저항 전술에 합의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회의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전투가 시작되어 있었다. 1775년 4월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벌어진 반군과 영국군 사이의 소규모 교전은 전면적인 봉기로 번졌다.

미국 독립혁명: 식민지 반란에서 미합중국 탄생까지1775년 5월 10일, 제2차 대륙 회의가 더욱 강경한 저항 기조 속에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었다. 대표들은 회의를 '아메리카 합중 식민지'의 중앙 정부로 삼고, 보스턴 포위전에 참전한 부대를 '아메리카 대륙군'으로 받아들이며, 6월 15일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독립에 대한 생각은 1776년 1월 토머스 페인의 팸플릿 『상식(Common Sense)』 출판 이후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된다. 익명으로 발표된 이 팸플릿은 조지 3세를 '왕족을 가장한 야수'라 칭하며 공격하고 군주제를 비난했다. 페인의 논거는 결정적이었고, 드디어 1776년 7월 4일 제2차 대륙 회의가 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본국과의 이별은 확정되었고, 이것이 미국 독립혁명의 시작이었다.

1776년 12월, 조지 워싱턴의 부대는 얼어붙은 델라웨어 강을 도하해 트렌턴 주둔군에 대한 대담한 기습을 감행했다. 이 무렵부터 전황은 점차 영국의 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결정적 개입

1777년은 전쟁의 향방이 아메리카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전환점이 되었다. 1763년 영국에 패배했던 프랑스는 분쟁 초기부터 비밀리에 식민지 주민들에게 자금과 물자를 지원해 왔다. 1777년 여름에는 젊은 라파예트 후작이 자비로 장비를 갖춘 자원병 부대를 이끌고 반군을 도우러 직접 참전했다.

미국 독립혁명: 식민지 반란에서 미합중국 탄생까지버지니아에서 전투를 치른 라파예트는 잠시 프랑스로 돌아가, 벤저민 프랭클린의 프랑스 공식 지원 협상을 지원했다. 사라토가 전투에서 반군의 승리를 통해 아메리카 사업의 탄탄함을 확신한 루이 16세는 1777년 12월 17일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했고, 이듬해 2월 6일 두 개의 조약에 서명했다. 하나는 우호 통상 조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할 경우 두 나라가 동맹을 맺는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의 결정적 지원은 무기, 병력, 군함, 그리고 막대한 보조금 형태로 이루어졌다.

1778년 6월, 프랑스는 분리주의자 편에서 영국에 맞서 정식으로 참전한다. 1781년 8월 14일, 조지 워싱턴은 그라스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체서피크 만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즉시 버지니아 요크타운의 콘월리스 공격을 결심한다. 워싱턴과 로샹보의 병력과 포병은 클린턴을 뉴욕에서 감시할 부대만 남겨두고 강행군으로 남진했다. 그라스 함대는 8월 30일 체서피크 만 입구에 도착해 그레이브스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를 격퇴하고 콘월리스 군대 주변에 봉쇄망을 구축했다. 워싱턴의 지휘 아래 약 1만 6,000명의 미국·프랑스 연합군이 버지니아 민병대와 함께 요크타운을 포위했다. 콘월리스는 여러 차례 연합군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결국 1781년 10월 19일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독립혁명: 식민지 반란에서 미합중국 탄생까지요크타운 전투는 전쟁의 종식을 의미했다. 1782년 3월 초, 영국 하원은 반군과의 협상 개시를 승인했다. 영미 간 협상은 1782년 11월 30일 예비 조약 서명으로 이어졌고, 여기서 영국은 옛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하고 심지어 오대호 이남에서 미시시피강까지의 모든 영토를 새 나라에 넘겼다. 평화 협상은 1783년 9월 3일 영국과 미국 간의 파리 조약, 그리고 영국과 다른 교전국들 간의 베르사유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프랑스는 식민지 양보를 얻어냈으며, 스페인 역시 플로리다를 받았다. 영국 신민으로 남기를 원했던 아메리카인들은 왕령 식민지인 캐나다로 떠났다.

이 조약들에서 확정된 새로운 미합중국의 국경선은 프랑스와 미국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국경은 생크루아 강, 세인트로렌스 강과 대서양 사이의 분수령, 북위 45도선, 오대호 중앙선, 미시시피강, 북위 31도선으로 정해졌다.

미국 헌법의 탄생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 정부 조직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786~1787년, 헌법을 마련할 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헌법의 아버지들'로 불린 대표들 중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그리고 조지 워싱턴이 있었다.

미국 독립혁명: 식민지 반란에서 미합중국 탄생까지대표들은 어느 한 권력이 다른 권력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견제와 균형' 체계를 설계했다. 행정권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 있지만, 대통령에게는 입법 권한이 없다. 입법권은 구성원이 모두 선출되는 양원(상하 양원)의 고유 권한으로 남는다. 입법부와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최고 법원(사법부)은 법률 해석을 담당한다. 미국의 기본법은 18세기 최초의 성문헌법 중 하나였고, 권리장전은 시민의 권리를 명시하며 정부 권력에 구체적인 한계를 부과했다.

13개 영국 식민지는 유럽 종주국으로부터 독립한 최초의 사례였으며, 성문 헌법을 채택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다만 이렇게 쟁취한 정치적 독립에도 불구하고, 영국 왕실과의 특혜로운 경제·통상 관계까지는 뒤흔들지 않았다.

연방 확장의 시작

1788년 비준된 헌법은 1799년 발효되었고, 조지 워싱턴은 초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790년 로드아일랜드가 13개 식민지 중 마지막으로 연방에 가입했다. 연방은 곧바로 오하이오 강을 따라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으며, 1792년 켄터키를 편입했고, 이후 테네시와 다른 두 주가 뒤따랐다. 1800년에는 스페인이 할양하면서 미시시피 유역이 다시 프랑스의 손에 넘어왔다. 1803년, 유럽 전역에서의 전쟁 재정을 마련해야 했던 나폴레온은 이 방대한 영토 전체를 미국에 매각했고, 이른바 '루이지애나 매입'은 젊은 공화국의 면적을 사실상 배가시켰다. 이제 서부 개척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참고 문헌

- 『미국 혁명』, 베르나르 코트레, Tempus, 2004.

- 『미국 혁명 (1763-1789)』, 앙드레 카스피, Folio History,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