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칼루거레니 전투… '용감공' 미하이 칸타쿠지노스, 10만 오스만군을 격파하다

칼루거레니 전투…  용감공  미하이 칸타쿠지노스, 10만 오스만군을 격파하다

발칸 역사를 바꾼 전설적인 전투

칼루거레니 전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발칸 반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병력에서 7대 1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튀르키예에 가장 굴욕적인 패배 중 하나를 안겨준 전투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승리는 루마니아 민족 각성의 시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 지배 아래 놓여 있던 모든 발칸 민족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되었다.

전투의 배경

전투는 현재 루마니아-불가리아 국경 근처에 위치한 칼루거레니 마을 인근에서 벌어졌다. 루마니아 군대를 지휘한 이는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미하이 용감공(Michael the Brave)으로, 그의 어머니는 그리스계 출신인 테오도라 칸타쿠지니(Theodora Kantakouzini)였다.

미하이가 거느린 병력은 총 16,000명으로, 발라흐인과 용병, 트란실바니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와 맞선 것은 시난 파샤가 이끄는 최소 10만 명에 달하는 오스만 대군이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미하는 병력을 작은 네아졸브 강 인근의 습지 지대로 이동시켰다. 습지에서는 오스만군이 병력을 온전히 전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리를 이용한 함정 전략

강 위의 작은 다리는 오스만군이 미하이의 부대와 교전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요충지였다. 미하는 이 지점에 12문의 대포를 배치했다.

미하이의 구상은 오스만군이 다리를 건너도록 유도한 뒤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오스만군이 한꺼번에 다리를 건널 수 없으므로 선두 부대부터 집중 타격이 가능했다. 여기서 승리한다면 후퇴하려던 오스만군은 혼란에 빠지고, 뒤따르던 부대들까지 연쇄적으로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이었다.

공격과 기동

1595년 8월 13일(율리우스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23일), 미하는 오스만군을 도발하기 위한 공격을 감행했다. 시난 파샤는 이에 넘어가 12,000명의 기병에게 반격과 추격을 명령했다. 그런데 기병대가 강 건너편에 도착하자마자 오스만군은 미하이의 대포가 쏟아내는 집중 사격과 함께 그의 부대의 반격까지 받았다.

압박을 받은 오스만군은 후퇴를 시도했지만 수많은 병사들이 늪에 빠져 죽거나 강에 빠져 익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난은 가용 병력 전체를 동원해 공격을 재개했다. 그의 광신적인 예니체리 부대는 다리를 향해 돌진했고, 동시에 기병 부대들은 미하이 진영의 좌우 측면에서 강의 도하 지점을 찾아 적군을 포위하려 했다.

위기 돌파와 화려한 반격

예니체리의 맹공은 효과를 거두었고, 시난이 파견한 기병 한 개 부대가 미하이 군 좌익의 도하 지점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위협에 직면한 미하는 대포를 버리고 즉각 후퇴를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칼루거레니 앞에서 병력을 재정비하고 적의 진격을 저지했다. 더불어 코케아 대장 휘하의 400명 규모 기병대가 도착한 것을 호기로 삼아, 측면을 위협하던 오스만군을 향한 반격을 단행했다. 오스만군은 패배해 다리 쪽으로 밀려나다 예니체리 부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결국 오스만 보병과 기병이 뒤엉켜 기동도 전투도 불가능한 대혼란이 벌어졌다.

미하이의 병사들은 다리까지 진격해 공황 상태에 빠진 오스만군을 섬멸하고, 자신들의 대포를 되찾으며 적을 밀어냈다. 시난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코케아의 기병대가 기민한 기동으로 오스만 진영 깊숙이 침투해 큰 혼란을 일으켰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미하이가 직접 시난에게 돌격해 그를 말에서 떨어뜨렸다고 전해진다. 시난 파샤는 늪에 빠졌지만 노예 한 명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같은 시각, 시난이 미하이의 측면을 치라고 보냈던 두 번째 기병 부대는 정작 지휘관 하산 파샤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전장에 도착했다.

미하는 뛰어난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해 시난에 대한 추격을 중단하고 전 병력을 하산에게 돌려 그마저 완벽하게 격파했다.

압도적인 승리, 그리고 왈라키아 수복

승리는 압도적이었다. 미하는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내는 데 그치며 오스만군에게 1만~1만 5,000명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안겼다. 다만 그는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패배했음에도 적군의 병력은 여전히 자신보다 월등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하는 부쿠레슈티를 내주고 북쪽으로 후퇴했고, 부쿠레슈티는 오스만군에 점령당했다. 그러나 오스만군이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7,500명의 트란실바니아군과 2,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의 지원을 받아 전력을 보강한 미하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고, 터고비스테, 부쿠레슈티, 조르주에서 오스만군을 연파하며 왈라키아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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