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드 모르데하이 전투는 역사상 가장 놀라운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전차와 포병의 지원을 받는 정규군이, 사실상 자신들의 목숨과 갓 태어난 국가를 걸고 싸우던 평범한 시민들과 맞붙은 전투였기 때문이다.
신생국을 노린 아랍 연합군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했고, 유엔도 이 결정을 인정했다. 그러나 주변 아랍국들은 전혀 다른 입장이었고, 강대한 병력으로 신생국을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해 왔다. 이스라엘인들에게 '독립전쟁'으로 불린 이 전쟁은 유대 국가 수립 이후 최초의 아랍-이스라엘 분쟁이었다.
야드 모르데하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의 지도자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치의 이름을 딴 키부츠(유대인 농촌 공동체)였다. 1930년 가자와 아슈켈론을 잇는 도로 근처 언덕 위에 세워진 이곳에는 유대인 농민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전쟁 선포 이전부터 이집트군은 오늘날 이스라엘 땅에 병력을 파견하고 있었다. 이집트 군단은 1만 명 규모로 상당한 포병과 전차의 지원을 받았고, 필요하다면 공중 지원까지 가능한 부대였다.
아흐메드 알리 알무아위(Ahmed Ali al-Mu'awi) 장군 휘하의 이집트군은 진격 도중 마주친 다른 키부츠들을 쉽게 점령하거나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야드 모르데하이 앞에 선 장군은 이곳을 건너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을이 텔아비브로 이어지는 요충지인 해안 도로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집트 장군은 주력 부대에 예루살렘 방면으로 진로를 돌리라고 명령하고, 연대급 포병과 전차 분견대로 증강된 2,500명의 병력에게 키부츠 점령을 지시했다.
130명의 방어자
키부츠를 지키던 병력은 무장한 남성 90명과 여성 20명뿐이었다. 여기에 유대인 준군사조직 하가나(Haganah) 소속 전사 20명이 합류해 총 130명이 되었다. 5월 18일 저녁에는 아이 92명과 비전투원 여성들을 먼저 대피시켰다.
마을에 남은 것은 남성 110명과 여성 20명. 하가나 전사들이 보유한 기관총 1정과 영국제 PIAT 휴대용 대전차 발사기를 제외하면, 그들이 무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소총뿐이었다.
격전의 시작
1948년 5월 19일, 이집트군은 새벽 직후 공격을 개시했다. 전차와 포격의 엄호를 받는 보병 2개 대대가 키부츠로 돌진했고, 농장 울타리를 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결연하게 저항하는 방어자들 앞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날 방어자 측은 5명이 전사하고 11명이 다쳤다.
문제는 카이로 라디오가 이미 키부츠 함락을 보도했다는 점이었다. 이로써 이집트군은 선전 구호를 현실로 만들어야 하는 처지에 몰렸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을을 점령해야만 했다.
5월 20일 이집트군은 연속 공격에 나섰다. 자료에 따라 4회로 보기도, 7회로 보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든 모든 공격이 격퇴되었고 공격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방어자들은 이날 13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당했다.
같은 날 저녁, 영국군 출신 탈영병 6명이 합류한 준군사 소대 하나가 증원으로 도착했다. 이들은 PIAT 대전차 발사기 1문과 기관총 3정을 추가로 쥐여 주었다. 그럼에도 전력 차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더욱이 이집트군의 포병은 형편없이 부정확했고, 보병과 전차 사이의 협동 작전도 전무했다. 그 결과 그들의 공격은 일관성 없이 '무리 지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철수, 그리고 전투가 남긴 것
이후 이틀간 이집트군은 포격으로 키부츠를 두들겼고, 공군은 증원병력을 호위하던 이스라엘 부대를 공습했다. 농장의 주요 건물은 완전히 무너졌다. 23일, 드디어 전차와 보병의 협동에 성공한 이집트군이 재차 공격해 왔고, 이번에는 농장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지쳐 버린 몸에 탄약마저 바닥난 방어자들은 23일 저녁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실제로 적에게 들키지 않고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집트군은 너무도 눈치가 없어서 5월 24일, 텅 빈 이스라엘 진지에 4시간 동안이나 포격을 퍼부은 뒤에야 공격해 그곳을 차지했다. 전투 전체를 통틀어 이스라엘 측은 26명이 전사하고 49명이 부상당했다. 반면 이집트군의 손실은 최소 300~400명에 달했다.
그러나 키부츠 방어자들이 벌어준 단 며칠의 시간은 문자 그대로 전세를 뒤집었다. 이스라엘은 그 시간 동안 병력을 규합해 이집트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드 모르데하이의 키부츠 및 하가나 대원들.

키부츠 폐허(현재는 박물관)와 모르데하이 아니엘레비치 동상.

전투 전의 야드 모르데하이 키부츠.

1948년 독립전쟁 당시의 이스라엘 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