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바세레스(Cambacérès): 프랑스 혁명과 제정기를 관통한 법조 정치가
장 자크 레지 드 캄바세레스(Jean-Jacques-Régis de Cambacérès), 파르마 공작(Duke of Parma). 1753년 10월 18일 몽펠리에에서 태어나 1824년 5월 1일 파리에서 생을 마감한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법률가다.
혁명기의 신중한 법조인
캄바세레스는 몽펠리에 회계감사원 고문으로 재직하던 중 1789년 삼부회 선거에서 아쉽게 낙선했다. 이듬해인 1792년에는 국민공회에서 에로(Hérault) 주를 대표하며 정계에 입문했는데, 당시 그는 극도로 신중한 처세로 이름을 알렸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뒤에는 공안위원회에 합류했고, 바로 그 시기에 젊은 보나파르트를 만나 그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제2집정, 그리고 민법전 편찬
오백인 평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지나치게 온건하다는 평가를 받아 통령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시예스의 후원에 힘입어 1798년 7월 20일 사법장관에 임명되었고, 브뤼메르 18일(1799년 11월 9일) 쿠데타에 깊이 관여한 뒤 제2집정의 자리에 올랐다. 리시앙(Lucien)과 르브룽(Lebrun)과 함께 보나파르트의 핵심 조언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며, 교황청과의 협약(콩코르다) 체결과 민법전, 즉 '나폴레옹 법전' 제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역사가 타인(Taine)이 지적했듯이, 제2집정은 "두드러지게 빼어난 재주는 아니었으나 희귀할 만큼 건전한 상식과 제1집정에 대한 무한한 헌신"을 갖춘 인물이었다.
대제상으로서의 역할과 한계
캄바세레스는 입헌원로원(상원)을 주재하고 종신 집정제를 설계하는 데 기여했으며, 황제 즉위라는 구상에는 큰 열정 없이 순응했다. 국가 체제 안에서 제2의 서열을 내려준 데 대한 보상으로 국참사원 의원과 추밀원 회원 자리를 얻었고, 막대한 금품을 하사받아 1808년 3월에는 파르마 공작에 봉해졌다.
'제국 대제상(Archchancellor)'이라는 다소 모호하게 정의된 직책을 맡은 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모든 중요한 현안에 대해 자문을 받으며 온건한 견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이 항상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이혼 문제, 스페인과 러시아 원정 등은 그의 유보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다. 황제가 군에 머물 때마다 그가 섭정을 대행했지만, 나폴레옹에게 보내는 일일 보고서들은 그의 완전한 종속 지위와 독자적인 결정 권한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몰락과 말년, 그리고 개인적 면모
백일천하(Hundred Days) 기간 동안 직무 수행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정복고 이후 루이 18세는 그를 추방했다. 브뤼셀에서 약 2년을 보낸 끝에 그는 파리 귀환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동시대 인물인 라 레벨리에르 레포(La Révellière-Lépeaux)는 그를 "실제로 지닌 재주만큼이나, 어린아이 같은 허영심으로 더욱 유명했던… 우아하고 부드럽고 가녀린 남자"라고 냉철하게 평가했다. 캄바세레스의 만찬은 파리 최고의 미식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정작 자리의 분위기는 지루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화려하고 요란한 복장과 훈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그를 당시 수도 파리의 화제거리이자 웃음거리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