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소련 후방 깊숙이 진격했고, 같은 해 늦여름과 초가을, 우만과 키예프에서 벌어진 참혹한 패전 이후 소련군의 무장을 해제하며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 지역에 살던 여러 민족의 주민들은 대부분 빵과 소금(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전통 방식)으로 독일군을 환영했다.
우크라이나에 들어선 독일군
독일인들은 우크라이나인을 '열등 인종'으로 여겼지만, 그럼에도 협력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동안은 적극적으로 이용했다(스테판 반데라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이전부터 이미 최소 4천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국방군에서 복무하고 있었으며, 작전 초기 단계에서 독일 부대를 안내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크림반도(1942년 완전히 점령됨)를 제외한 옛 폴란드 남동부 일부(포돌리아) 지역 역시 독일 점령하의 우크라이나에 포함되었다. 서부 우크라이나인은 폴란드인, 갈리치아인, 코사크 등이 뒤섞인 집단으로, 역사적 환경 때문에 뚜렷한 민족 의식을 형성하지 못한 채 로마 가톨릭 폴란드인, 정교회 러시아인, 이슬람 튀르크의 지배를 시기마다 번갈아 받아왔다.
종교적으로 폴란드인은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코사크는 정교회 신자, 타타르는 이슬람교도였다. 그리고 다수파인 갈리치아인들은 동방 예식을 따르면서도 바티칸의 관할에 속하는 그리스 가톨릭, 이른바 '우니아트(Uniate)' 신자들이었다.
이토록 민족과 종교의 분열이 깊었던 땅에서 독일인들이 쉽게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리벤트로프-몰로토프 조약에 따라 1939년 소련에 편입된 지역에서는 소련 권력이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코사크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러시아인과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이 문자 그대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눈에 이들은 기근, 역병, 집단화라는 고통을 안겨준 증오하는 소련 권력 그 자체였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독일 편에 섰다. 독일은 서부 우크라이나인의 협력 아래 유대인 박해를 본격화했고, 우크라이나인의 도움으로 수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러한 협력의 전형적인 사례가 1941년 바비 야르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로, 이곳에서 수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경찰' 대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조직들은 독일과 손잡았다. 하버드대학교의 현대 연구에 따르면, 이 조직들의 상당수 인원과 간부는 국가 통제와 유대인 사냥을 목적으로 독일이 창설한 '우크라이나 경찰 대대'에서 복무했거나, 소련 전선 후방에서 활동하기 위한 스파이로 훈련을 받았으며, 트레블링카·소비보르·벨제크 절멸수용소의 경비원으로 훈련받아 근무하기도 했다. 이 수용소들의 경비원은 전원이 우크라이나인이었고, 독일인은 지휘를 맡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경찰 대대는 공식적으로 7개가 창설되었으나 그 수는 점차 늘어났다. 이 대대들은 독일군의 치안 소탕 작전에 동원되었으며, 대원들은 수천 명에 달하는 민간인 살해에 책임이 있었다. 예컨대 제118 경찰 대대는 벨라루스의 하티니(Khatyn) 마을 주민 전원을 산 채로 불태워 죽였는데, 하티니는 스탈린이 폴란드 장교들을 학살한 카틴 학살과 이름이 비슷해 자주 혼동되는 곳이다.
제14 무장SS 자원사단
같은 시기, 나흐티갈 대대, 롤란트 대대, 제3 자원연대, 제4 자원연대처럼 독일군 정식 편제에서 복무한 특수 부대들도 조직되었다. 우크라이나인 참여의 정점은 바로 제14 무장SS '갈리치아(Galizien)' 자원사단의 창설이었다. 독일이 이 사단을 채우기 위해 자원병을 모집했을 때 무려 8만 명 이상이 몰려들었고, 그 대부분은 갈리치아의 동방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최종적으로 1만 3천 명이 이 사단에 배속되었다. 독일은 우크라이나인 병사들이 군종 신부를 둘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SS 부대로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특혜였다. 사단은 3개 보병연대(제29·30·31연대), 제14 엽병대대(경기동 정찰대대), 포병연대, 공병대대, 수송대대 및 각종 지원 부대로 구성되었다.
사단의 명칭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에는 SS 자원사단이라 불렸고, 이후 제1 SS 척탄병사단 '갈리치아', 다시 제1 SS 척탄병사단 '우크라이나',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 국민군 제1사단으로 변경되었다.
1944년 7월, 이 사단은 브로디 전투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재편성된 뒤 독일 편에서 계속 싸우며 슬로바키아까지 진출해, 독일에 반기를 든 슬로바키아인들과 맞서 싸웠다. 이후 슬로베니아로 파견되었고, 마침내 오스트리아로 이동하여 1945년 4월 중순까지 소련군과 교전했다.
사단 외에도 독일은 5개의 갈리치아 보병연대를 추가로 창설했다. 이들은 주로 민간인인 폴란드인들의 수많은 잔혹한 죽음, 마을 전체의 방화와 약탈에 책임을 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