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나폴레옹의 불패 원수, 루이 니콜라스 다부 — 아우어슈테트 공작이자 에크뮐 왕자

루이 니콜라스 다부(Louis-Nicolas Davout, 1770년 5월 10일 아누 ~ 1823년 6월 파리)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시대를 대표하는 군인으로, '아우어슈테트 공작(Duc d'Auerstaedt)'이자 '에크뮐 왕자(Prince d'Eckmühl)' 칭호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나폴레옹 휘하 원수 중 유일하게 주요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은 장군으로 평가받으며, 철저한 준비성과 엄격한 규율로 '철벽의 다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귀족 출신 혁명 장교

군인 가문의 아들이자 귀족 출신인 다부는 1785년 파리 사관학교에 귀족 신분의 견습생(cadet-gentilhomme)으로 입학했다. 혁명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자신의 행동 탓에 두 차례 체포되기도 했다. 1791년 군에서 사임했으나 같은 해 9월 22일, 욘(Yonne) 지방 의용병 부대의 중령으로 선출되며 복귀했다.

북부 전선으로 파견된 다부는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Neerwinden) 전투에 참전했으며, 적진으로 넘어가려는 뒤무리에(Dumouriez) 장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방데(Vendée)로 전출된 그는 1793년 7월 준장, 이어 사단장으로 승진했으나, 구 귀족(ci-devant noble)의 군 복무를 금지하는 법령에 따라 승진을 거부하고 사임했다.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인 1794년 가을에야 복무에 복귀한 그는 준장 신분으로 라인 전선에서 싸웠다.

1795년 만하임(Mannheim)을 점령했으나, 같은 해 9월 18일 도시가 항복하면서 포로로 잡혔다. 곧 포로 교환으로 풀려난 다부는 라인 전선으로 복귀해 켈(Kehl)을 공격했고, 1796년 7월 14일 하슬라흐(Haslach) 전투에 참전했다. 1797년 4월 21일에는 클링글랭(Klinglin)의 마차에서 피셰그뤼(Pichegru)의 서신을 확보하여, 그가 망명 귀족들과 밀약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결정적 단서를 손에 넣었다.

이집트 원정과 보나파르트와의 인연

데제(Desaix) 장군의 소개로 보나파르트를 알게 된 다부는 그를 따라 이집트 원정에 참여해 기병 여단을 지휘했다. 피라미드 전투, 룩소르, 아부키르 등 이집트의 주요 전투 대부분에 참전했다. 1800년 3월 3일 데제와 함께 프랑스로 향했고, 리보르노(Livorno)에서 한 달간 영국군에게 억류된 끝에 5월 6일 툴롱에 도착했다.

1800년 7월 3일 사단장으로 승진한 다부는 이탈리아 방면군 기병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804년 5월 19일 제국 원수로 임명되었으며, 근위대 4명의 대령장(colonel général) 중 하나가 되었다. 1805년 오스터리츠(Austerlitz) 전투에서는 우익을 지휘하며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우어슈테트의 영광

1806년 프로이센 전역의 승패를 가른 것 역시 다부였다. 예나(Jena)에서 황제가 적군과 교전하는 동안, 다부는 아우어슈테트(Auerstedt)에서 프로이센군 주력의 공격을 단독으로 받아내고도 승리를 거두었고, 이 덕분에 나폴레옹의 예나 전투가 한결 수월해졌다. 그 공로로 다부는 1806년 10월 25일 최초로 베를린에 입성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폴란드에서도 연이어 승리를 거듭했고, 아일라우(Eylau) 전투에서는 우익을 지휘했다. 1808년 3월 28일 아우어슈테트 공작 작위를 받고 바르샤바 대공국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809년 전역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그는 에크뮐(Eckmühl)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바그람(Wagram) 전투에서는 우익을 이끌고 적을 격퇴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나폴레옹은 1809년 8월 15일 그를 에크뮐 왕자로 임명했다.

러시아 원정과 함부르크 방어

1810년 초부터 독일 방면군 총사령관을 맡은 다부는 러시아 원정을 준비하고 공세 개시를 지휘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다부의 신중한 작안보다 무라(Murat)의 과감한 방식을 선호하면서, 모스크바 강(보로디노) 전투는 피비린내 나는 무승부로 끝났다. 회군길에서 프랑스군은 전쟁으로 황무지가 된 온 길을 되짚어야만 했다.

1813년에는 드레스덴을 방어한 뒤 함부르크(Hamburg)에 들어가 농성했다. 그는 1814년 5월 27일, 루이 18세의 명령에 따라서야 도시를 넘겨주었다.

백일천하와 말년

백일천하 기간인 1815년 3월 20일부터 7월 8일까지 육군장관을 지냈다. 이후 루비에(Louviers)에서 감금 생활을 보냈으나, 국왕은 결국 1817년 그에게 원수 지휘봉을 돌려주었고, 1819년에는 프랑스 귀족원 의원(peer de France)으로 임명했다.

나폴레옹의 원수 중 유일하게 패배하지 않은 다부의 이름은 당연히 파리 개선문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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