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로마 기병대의 실체: 역사 속에서 지워진 무명 정예 투사들

로마 기병대의 실체: 역사 속에서 지워진 무명 정예 투사들

로마 기병대, 신화 뒤의 진실

로마 기병대는 초기에 조밀한 대형으로 싸우지 않거나, 기병 돌격을 버틸 만큼의 훈련을 받지 못한 보병들, 즉 리구리아인·삼니움인·갈리아인 같은 부대와 자주 마주했다. 이런 보병을 상대로는 대규모 기병의 정면 돌격이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로마 기병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헤타이로이 같은 순수한 충격 기병은 아니었지만, 고대 세계의 대부분 그리스·이베리아·카르타고·갈라티아 기병처럼 전형적인 경기병에 가깝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 왕의 정예부대가 지녔던 돌진력과 추진력을 그대로 간직한 부대였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173년 로마-리구리아 분쟁에서 로마 보병이 상대 보병을 돌파하지 못하자, 당시 지휘관이자 최고 사제였던 파필리우스가 기병 공격을 명령했다. 로마 기병은 세 개 부대로 나뉘어 한 부대는 정면으로, 나머지 두 부대는 양 측면에서 적을 압박했다.

전투의 정확한 경과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양읍 포위를 두려워했거나 이전의 보병 전투에서 이미 혼란에빠져 있던 리구리아인들은 결속력을 잃었고, 로마 기병은 그 진형에 균열을 내는 데 성공했다. 균열을 통과한 로마 기병은 적 후방에 위치하게 되었고, 이후 대학살이 벌어졌다.

기원전 207년 메타우루스 강 전투에서도 제3군단 소속 기병 300여 명은 카르타고 보병이 전투 대형을 갖추기도 전에 선제 공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 반면 기원전 195년 스페인에서는 로마 기병이 적 측면을 공격했지만, 이베리아인들이 신속히 조직을 재정비하여 돌격을 격퇴했다.

이 두 사례는 아직 전투 대형을 갖추지 못한 보병을 상대로 기병을 활용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반대로 측면까지 치밀하게 보호된 상태의 대형 보병을 로마 기병이 단독으로 격파한 기록은 단 한 건뿐이다.

클라스티디움 전투

기원전 222년, 귀족 출신 장군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롬바르디아의 클라스티디움(현 카스텔레조)을 위협하던 갈리아인을 향해 약 5,000명의 기병과 필등한 보병을 이끌고 진군했다. 갈리아인은 로마군의 접근을 감지하고, 포위된 도시를 지키기 위한 소수 병력을 남겨둔 채 전투 대형을 갖췄다.

갈리아 보병은 오직 사기 붕괴 외에는 깨뜨릴 수 없는 밀집 대형을 형성했다. 로마 기병은 즉시 돌격했지만 밀집 진형 앞에서 패배하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갈리아인들은 중앙을 두껍게 강화하느라 측면이 오히려 얇아지고 말았다.

마르켈루스는 이 허점을 간파하고 기병에게 양 끝단을 공격한 뒤, 적 후방에 도달하면 다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측면과 후방이 동시에 위협받자 갈리아인은 이번엔 도주했고, 추격하는 로마 기병의 칼날 아래 학살당했다.

로마군의 양 측면 공격은 갈리아인의 사기를 완전히 무너뜨려 반격할 여지조차 남기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갈리아인은 로마군보다 3:1로 수적 우위에 있었음에도, 폴리비오스가 기록했듯 '싸움 자체를 저버리고' 패주한 것이다.

텔라몬 전투

이러한 기병의 대승은 공화정 시대에 다시 재현되지 않았다. 로마군이 보병 지원 없이 기병만으로 보병 부대를 상대한 경우는 드물었는데, 토스카나에서 벌어진 텔라몬 전투가 그 드문 사례이다.

이 전투는 로마가 거의 모든 최전선 병력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총 75,400명의 두 개 로마군이 70,000명의 갈리아군과 충돌했다. 로마군은 보병에서는 우세(7만 대 5만)했지만, 기병에서는 크게 열세(5,400 대 20,000)였다.

전투는 로마 보병이 각각 갈리아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맞서던 갈리아인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공격을 버텨냈다. 이에 로마 지휘관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기병에게 갈리아 보병 우익을 감싸는 전략 요충지인 낮은 언덕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로마 기병은 상대가 더 높은 고지를 점해 유리함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갈리아 기병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곧이어 레굴루스가 전사했지만, 로마 기병은 갈리아군을 언덕 남쪽 사면과 바다 사이로 몰아붙였다. 이미 아일리우스 파푸스가 이끄는 제2로마군이 그들의 남쪽을 차단한 상태였다. 세 면이 포위되고 유일한 출구가 바다뿐이었던 갈리아인은 몰멸당했다. 4만 명 이상이 전사하고 1만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이 전투에서 갈리아인이 전차까지 동원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자마 전투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는 로마 보병과 기병의 완벽한 협동 작전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로마군은 총 6,100명의 기병을 운용했는데, 이 가운데 4,000명은 누미디아 동맹군이었다. 누미디아 기병은 로마 진영의 우측에, 로마 기병은 좌측에 배치되었고, 맞은편에는 2,000명의 카르타고 기병이 자리했다. 로마 측 누미디아 기병은 적 기병보다 2:1로 수적 우위에 있었다.

전투는 한니발이 8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적 중앙으로 돌격시키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로마 지휘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미리 준비해 둔 나팔을 크게 불어 코끼리를 놀라게 하라고 기병에 명령했다.

이 계책은 부분적으로 성공하여, 패닉 상태가 된 코끼리들이 아군 진영을 짓밟으면서 카르타고 좌익은 혼란에 빠졌다. 누미디아 기병은 이 혼란을 놓치지 않고 돌진하여, 처음부터 수적으로 열세였던 카르타고 기병을 격파했다.

로마 좌익의 기병 역시 첫 돌격만으로 적을 패주시키고 카르타고 진영까지 추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에 취해 추격을 계속하지 않고 즉시 재정비한 뒤 카르타고 보병의 후방을 타격했다. 결국 포위된 카르타고 보병은 섬멸되었다. 카르타고군은 2만 명 전사, 2만 명 부상으로 사실상 전멸한 반면, 로마군의 피해는 전사 2,500명, 부상 4,000명에 그쳤다.

갈라티아인과 켈트이베리아인

또 다른 사례로 기원전 193년,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집정관의 군대는 갈리아 부족 보이이족과 교전 중이었다. 티투스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아인은 로마 군단의 초반 공격을 격퇴했고, 이에 지휘관은 보병과 기병의 합동 공격을 결심했다. 정예 보병이 정면에서 갈리아군을 묶어두는 동안, 상대 기병을 이미 무력화한 것으로 보이는 로마 기병이 갈리아 대형의 측면을 강타했다.

갈리아인은 위협에 맞서 정면을 돌리려 했지만, 로마 및 라틴 기병 동맹군의 신속한 역습에 좌절했다. 기록에 따르면 라틴 기병은 갈리아 보병의 대열 사이로 파고들어 혼란을 일으켰고, 그 혼란은 이윽고 공포로 번졌다. 보병과 기병의 합동 공격 앞에 갈리아 대형은 완전히 붕괴했고, 로마 기병은 패주하는 적을 추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리비우스는 또 다른 예로 기원전 180년경 스페인에서 벌어진 로마군과 켈트이베리아인의 전투를 소개한다. 켈트이베리아인은 스페인에서 가장 호전적인 부족으로 불렸고, 로마군에게도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이 전투에서 켈트이베리아인은 돌격 보병을 첨두(楔形) 대형으로 편성해 로마 군단을 가르며 공격해 왔다.

상황은 로마군에게 매우 위급했지만, 지휘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락쿠스는 과감히 기병을 적의 인간 돌격 대형에 투입하기로 결심한다. 로마 기병은 말의 고삐를 느슨히 풀어, 통제는 어려워도 더욱 격렬하게 달릴 수 있게 했다.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두 차례의 거친 돌격을 감행했다.

리비우스는 "마침내 부러지지 않은 창이 하나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로마 기병의 연타 아래 켈트이베리아인의 대형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재정비를 마친 로마 보병이 즉시 개입해 적 진형을 분쇄했다. 켈트이베리아인이 도주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다시 기병의 차례였다. 로마 기병은 패주하는 적을 끝까지 추격해 승리를 확정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