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코카서스 석유를 잃은 독일군…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가른 유전 쟁탈전

코카서스 석유를 잃은 독일군…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가른 유전 쟁탈전

독일은 석유를 생산하지 못하는 나라다. 이는 과거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진실이다. 1939년 당시 독일은 석유 수요의 7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은 국제 석유 시장 대부분에 대한 접근을 상실했고, 유일한 예외는 1939년 8월 리벤트로프-몰로토프 조약(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로 열린 소련 시장이었다.

소련산 석유에 의존하던 독일군

이후 18개월 동안 독일은 소련으로부터 매달 약 5만1천 톤의 석유를 구매했다. 소련산 석유 덕분에 독일군은 서유럽과 발칸에서 승슬장구하는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크렘린이 결정만 내리면 언제든 공급이 끊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소련 석유에 종속되어 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대소련 공격 계획과 석유

석유는 히틀러가 1940년부터 구상하기 시작한 대소련 공격 계획의 핵심 축이었다. 1940년 12월 21일 히틀러는 지시서 제21호에 서명했다. 이는 전격전(블리츠크리그)으로 소련을 무너뜨리고, 최종적으로 코카서스 지역의 풍부한 유전을 장악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히틀러는 스탈린과 맺은 협정 덕분에 소련을 공격하는 데 필요한 석유 비축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소련산 석유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소련 공격 자체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과 로스토프 함락

‘바르바로사 작전’이라 불린 대소련 공격은 독일에게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광활한 영토, 적의 어마어마한 물량, 그리고 스스로 저지른 오류 앞에서 좌절되었다. 1941년 11월 20일 독일군은 ‘코카서스의 관문’이라 일컬어지던 로스토프를 점령했다.

그러나 한겨울 러시아에서 이 성과를 활용할 여력은 거의 없었다. 이어진 모스크바 전투의 패배와, 통일성은 없었지만 격렬했던 소련군의 반격으로 독일군은 방어로 전환해야 했다. 로스토프는 곧 소련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하르코프 참패가 만든 기회

그러나 1942년 봄, 스탈린의 강요로 감행된 소련군의 무모한 반격, 특히 동부 전선 남쪽에서 벌어진 재앙적인 하르코프 반격은 소련의 귀중한 예비 병력을 낭비시켰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남동부에 거대한 공백이 생겼고, 히틀러는 이 틈을 이용해 코카서스 유전 지대 정복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70%의 석유가 걸린 판돈

독일군은 소련 석유 생산량의 70%가 코카서스 유전에서 나온다고 추산했다. 이는 이 지역 정복이 독일에 가져다줄 이점을 넘어, 동시에 적이 전쟁을 지속할 능력 자체를 박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구상 자체는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실전 적용이었다.

괴링의 낙관적 생산 계획

석유 공급을 총괄하던 괴링은 히틀러의 계획에 적극 개입했다. 그는 석유회사 ‘콘티넨탈레 올 AG(Kontinentale Öl AG)’와 협력해, 마이코프 유전 점령 6개월 후 월 3만 톤의 생산이 가능하고, 그로즈니에서 추가로 월 9천 톤을 생산하며, 최종적으로 1943년까지 100만 톤 생산을 달성하겠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작전의 실행과 좌절

리스트 원수 지휘 아래 독일군은 오늘날의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42년 11월 13일부터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한 맹렬한 반격을 개시했다. 한편 더 북쪽의 스탈린그라드에서는 파울루스의 제6군이 이미 포위된 상태였다. 독일의 모든 증원 부대는 그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스탈린그라드의 붕괴와 함께 코카서스 전선의 독일군 역시 포위 위기에 처했다. 결국 철수가 결정되었고, 독일군의 후퇴는 1943년 1월 2일 시작되었다. 히틀러의 귀중한 석유 확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값비싼 실패의 대가

실패는 고통스러웠다. 7만2천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과 막대한 물자 손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독일이 이 광역 지역을 점령한 기간 전체를 통틀어 의미 있는 양의 석유를 추출하지 못했다는 점이야말로 진짜 문제였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코카서스 유전 지대에서의 독일군 작전은 히틀러가 충분한 병력을 투입하지 않은 데서 무너졌다. 그는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의 학살에 투입하는 쪽을 선택했다. 리스트의 부대가 처음부터 증강되었다면 쿠반 지역의 소련군 저항을 더 빨리 돌파하고, 요충지인 흑해 항구 투압세와 수후미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작전에서 다른 모든 요소를 뛰어넘는 촉매는 바로 ‘시간’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작전의 초기 설계 단계에서도, 실행 단계에서도 이 요소를 존중하지 않았다. 리스트의 전투 지휘 역시 문제가 많았다. 독일 산악병이 코카서스 최고봉 엘브루스를 ‘정복’하는 드라마틱한 행보는 실질적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소련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전투는 초기에는 과도하게 분산된 병력으로 치러졌다. 지휘부가 저지른 여러 오류가 없었다 해도 독일군을 막아내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버텨냈고, 마침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붕괴하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그 대가로 코카서스 전역에서 5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영구적인 연료 빈곤으로 이어진 패착

석유 산출 지역 정복에 실패한 독일은 영구적인 연료 빈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전쟁 패배의 큰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코카서스 석유를 잃은 독일군…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가른 유전 쟁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