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역사상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의 에너지와 집요한 관심 덕분에 로마 시대 이후 유럽이 본 적 없는 최강의 군대가 탄생했다.
그 자신이 절제와 규율을 몸소 실천한 인물답게, 그는 1713년 즉위부터 1740년 사망할 때까지 왕국 전체에 같은 질서와 규율을 강제했으며, 후계자 프리드리히가 훗날 '대왕(Frederick the Great)'으로 불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국가 예산의 80% 이상을 국방에 투입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국가 재정에 깊이 관여하며 수입과 지출을 철저히 조율했지만, 군대 재정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왕실 금고의 연간 수입은 약 730만 프로이센 탈러(은화)로 추산되었다. 이 가운데 490만 탈러가 군대에, 추가로 100만 탈러가 방어 시설에 투입되었다! 이는 20세기 전체주의 체제조차 비례적으로 따라잡지 못한 놀라운 '국방 지출' 비율이었다.
'군인 왕'의 군사 개혁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유럽에서 '군인 왕(Soldier King)'으로 불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즉위 직후 군의관 양성 학교, 장교 학교, 무기와 대포 생산 공방, 그리고 전사자 유족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잇달아 설립했다.
영리한 징병 제도
그는 국가를 군관구로 나누는 징병 시스템을 고안했다. 5,000세대마다 전투 대대 2개와 예비 대대 1개를 갖춘 보병 연대가 편성되었고, 1,800세대마다 기병 연대 하나가 만들어졌다. 덕분에 전쟁 중에도 나라에는 일손이 부족하지 않았다.
군사 혁신의 선구자
오늘날 '구보 행진(goose step)'으로 알려진 제식 행군도 그의 시대에 확립되었다. 병사들이 대형을 깨뜨리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진군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머스킷 총의 총구를 쇠로 바꾼 것도 그의 업적인데, 그 이전에는 쉽게 부러지는 나무 총구가 사용되었다.
주력 보병 전투 대형은 3열 종심 대형으로 정해졌다. 이를 통해 대형 안의 모든 병사가 사격에 참여할 수 있었다(1열 병사들은 무릎을 꿇고 사격했다). 동시에 그는 보병 대대마다 정예 유탄병 중대를 창설하라고 명령했다.
세계 최초의 현대적 군 규정
그의 명령에 따라 세계 최초의 현대적 군 규정이 작성되었다. 이 규정은 복장과 태도는 물론, 장교·부사관·병사의 행동 반경까지 군대의 모든 것을 상세히 규정했다.
아들 프리드리히 대왕이 회고했듯이, "국왕은 그토록 규율에 철저해서, 만약 규정에 맞지 않는 군복을 입었다면 자기 자신을 처벌했을 것"이다. 그는 엄격했지만 상급 장교들에게는 친근한 동료였고, 그 밖의 이들에게는 진정한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그는 훗날 아들과 마찬가지로, 국왕이란 단지 나라의 최고 공무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믿었다.
상류층의 의무는 어떤 형태로든 나라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프로이센 장교들이 부사관부터 대령까지 계급장을 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장교를 한 가족의 일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국민방위군과 병사 복귀 제도
정규군 외에도 그는 국민방위군(National Guard)을 창설했다. 이들은 매년 정해진 날짜에 의무적으로 훈련을 받았고, 훈련으로 인한 일缺席에 대한 보상금을 국가로부터 지급받았다. 국민방위군 연대는 항상 현역 핵심 인력을 유지해 단기간 내 동원이 가능했다.
훈련을 마친 정규군 병사들에게는 10개월간의 휴가가 주어져 고향에 돌아가 평소처럼 일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국가는 병사들의 식량과 피복 비용 부담에서 자유로워졌다.
800만 탈러의 유산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했음에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철저한 감독과 강력한 재정 규율 덕분에 아들에게 빚진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800만 탈러가 넘는 준비금을 물려줄 수 있었다.
그는 아들 프리드리히와 자주 충돌했지만, 프리드리히가 국정을 맡은 뒤에는 아버지의 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했다. 다른 유럽인들이 붙여준 별명, '신(新) 스파르타'(프로이센의 별칭)의 왕으로서의 길이었다.

지휘봉을 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1733년 초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