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라고 하면 누구나 레오니다스 왕과 그의 부대를 떠올립니다.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동맹군과 함께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침략군의 진격을 막아선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힘 덕분에 오늘날 이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 소개할 것은 또 다른 '300명의 스파르타인'입니다. 이들의 적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같은 그리스인, 즉 아르고스였습니다.
이 전투는 기원전 545년에 벌어졌습니다.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80년)보다 앞선 시기의 일입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고대 그리스가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수많은 폴리스(도시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도시 국가들은 동맹 관계, 영토, 상업적 패권을 놓고 끊임없이 충돌했고, 이 불안정한 구도는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폭발하지만 그 이전에도 산발적인 충돌이 적지 않았습니다. 스파르타와 아르고스가 벌인 '300인의 전투'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전쟁의 명분(카수스 벨리)은 티레아 평원의 지배권이었습니다. 이곳은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아카디아 지역으로, 라코니아와 아르골리스 사이의 관문 역할을 했고, 바다로 통하는 귀중한 출구까지 갖춘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양국 모두가 탐냈습니다. 스파르타가 이곳을 점령하자 아르고스는 전쟁에 나섰는데, 이는 양국 사이에 이어져 온 오랜 전쟁 전통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주기적인 충돌이 반복되던 가운데, 기원전 669년에는 히시아이 전투(팔랑크스가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제2차 메세니아 전쟁기의 교전)에서 아르고스가 우위를 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스파르타는 아직 훗날과 같은 군사 강국이 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측은 끊임없는 유혈사태에 지쳐 있었고, 경쟁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합니다. 전군을 동원하는 대신, 각각 선발된 300명으로만 구성된 두 부대가 맞붙는 것입니다. 승자는 티레아 평원을 차지하고, 수천 명의 목숨을 건집니다. 물론 조건은 가혹했습니다. 휴식도, 부상자를 살피는 여유도 없이 싸워야 했고, 사실상 죽음을 건 결투였습니다. 더 약한 쪽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패배하는 방식이었으니까요.
헤로도토스의 『역사』(일명 '9권의 역사')에 따르면, 두 군대는 사고를 막기 위해 정해진 날에 철수했고, 선발된 전사들만 전장에 세워졌습니다. 각 진영의 최정예 호플리테스(중장보병)로 구성된 이들이었으므로 '용사들(champions)'이라 불릴 만했습니다. 이런 대표 결투는 단독 전투의 고급 형태로, 흔하지는 않지만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서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헥토르와 아이아스, 투르누스와 아이네아스처럼 잘 알려진 선례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종교 의식에 따른 제사를 마친 뒤, 아르고스인과 스파르타인은 지칠 때까지 피를 흘리며 싸웠습니다. 마지막 스파르타 전사가 쓰러졌을 때, 아르고스 진영에는 두 명이 아직 서 있었습니다. 지친 몸으로 승리를 확정하고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그들은 아르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알케노르(Alcenor)와 크로미오(Cromio)라 불린 이 두 사람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오트리아데스(Otríades)라는 이름의 스파르타 중장보병이 중상을 입은 채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두 아르고스인이 떠나자, 그는 전장에 남은 마지막 사람, 곧 진정한 승자가 되었습니다. 오트리아데스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장비를 옮기던 헬로트에게 상황을 알릴 시간은 있었고, 전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피로 방패에 전황을 새겼다고 합니다.
한 기록은 그가 유일한 생존자가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하고, 다른 견해는 처음부터 상태가 너무 위중해 아르고스인들이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봅니다. 또한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전사한 동료들을 대열(팔랑크스)로 정렬해 놓고 그곳에 서 있었다고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습니다. 아르고스는 승리를 선포했지만, 스파르타는 오트리아데스가 아르고스의 검이 아니라 스스로의 손에 죽었다며 똑같이 승리를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대표 결투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셈입니다.
라코니아 쪽에서는 마지막 전사가 쓰러진 자리에 승리의 여신 니케 제단을 세웠고, 아르골리스는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양측은 다시 전군을 이끌고 맞붙었고, 이번에는 예외 없이 모두가 참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헤로도토스는 당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풍습에 대해 언급하면서, 승리를 거둘 때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는 서약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실제로 고대에는 긴 머리가 귀족 신분을 드러내는 표식이기도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긴 머리는 육체노동과 양립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스파르타였습니다. 이후 몇 년간 스파르타는 티레아를 정복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피갈리아, 히라, 필로스, 메토네, 테게아 등의 도시를 차례로 손에 넣었으며, 나아가 아르골리스 깊숙이 들어가 수도를 약탈하고 남성들을 잔혹하게 학살해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인구를 장악했습니다. 이런 구도는 이미 아르키다모스 전쟁(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분류되는 첫 번째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20년에 또다시 갈등이 일어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아르고스는 다시 새로운 대표 결투를 제안했지만, 당시 스파르타는 이미 강대국이 되어 있었고 그런 방식으로 싸울 이득이 없었기에 제안을 거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