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유럽 군대에서 포병은 명망 높은 보병과 기병에 비해 늘 '가난한 친척' 취급을 받았다. 오스트리아군을 제외한 대부분 국가의 군대가 그랬는데, 프로이센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포병에는 주로 시민 계층 출신이 배치되었고, 귀족들은 보병과 기병 등 다른 병과에 자리를 잡았다.
2류 병사로 전락한 포병
심지어 포병 인력 충원 자체도 문제였다. 다른 병과에서 걸러진 사람들이 그대로 포병에 굴려졌기 때문이다. 포수들은 장교든 병사든 '장인' 혹은 육체노동자 같은 2류 병사로, 군대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이런 대우는 필연적인 결과를 낳았다. 프로이센 포병의 질은 낮았고, 특히 유능한 장교 확보가 어려워 부대 충원율도 저조했다. 상대적으로 저조했던 프로이센 포병의 성과는 운용 화포 자체의 결함에서 비롯된 면도 컸다.
열등한 화포, 무방비한 포수
프로이센의 대포는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산에 비해 더 무거웠고 사정거리도 짧았다. 제작이 조잡해 정확한 조준이 쉽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프리드리히 대왕 본인도 훈련 중 표적을 맞히지 못한 포수들을 호통을 내린 적이 있다. 왕이 직접 조준해 어쩌면 요행으로 표적을 명중시키자, 분노한 포수들은 다시 한번 쏴보라고 도전했다.
그러나 왕의 두 번째 발포는 안타깝게도 빗나가고 말았다. 이 일화는 당시 대포의 비효율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삽화다. 포수들의 무장 부족도 심각한 문제였다. 이들은 짧은 검 하나만 소지했으므로, 적이 진지를 기습할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프로이센 포수들은 준수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특히 로스바흐, 로이텐,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는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포병 조직의 성장 과정
1740년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올랐을 때 포병은 야전포 6문과 요새포 4문을 보유한 단 하나의 포병 중대만을 가지고 있었다. 1741년 두 번째 중대가 창설되었는데, 통상포 5문과 공성용 '폭격병(Bombardier)' 포 1문으로 구성되었으며, 곡사포와 박격포로만 무장되었다.
1742년에는 요새포병 연대가 하나 더 만들어졌다. 1744년에는 두 중대가 통합되어 제1야전포병연대가 되었고, 초대 연대장은 전직 오스트리아군 장교 폰 슈미타우였다. 그는 '프로이센 포병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7년 전쟁이 발발하자 세 번째 중대가 창설되었고, 1762년에는 마찬가지로 3개 분견대로 구성된 제2포병연대가 편성되었다.
포병 집중 운용과 화포 체계
7년 전쟁 후반기에 프리드리히는 보병 전력의 열세를 대규모 포병 집중 운용으로 만회하려 했다. 그래서 포병의 재건과 강화, 신형 화포로의 재무장에 큰 비중을 두었다. 1772년까지 4개 포병연대가 창설되었고, 각 연대는 2개 중대를 두었다.
포병 중대 하나는 병력 300명과 화포 8~12문으로 편제되었다. 당시 운용된 주요 화포는 다음과 같다.
- 24파운드 중포 및 12파운드 중포, 8인치 야전 곡사포
- 12파운드 중형포 및 10파운드포
- 6파운드 중경포 및 7인치 곡사포
- 3파운드 또는 6파운드 경포
이 가운데 경포는 보병 대대의 직접 지원용으로 배속되었다(대대당 1~2문). 이른바 '대대포'라 불린 이 화포는 보병 부대에 파견된 포병 포수와 장전수, 그리고 보병들이 함께 운용했다.
기마포병의 선구자
프로이센군은 기마포병 창설에서도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다. 기마포병은 포수들이 말을 타고 이동한다는 점에서 일반 진지 포병과 구별되었다. 덕분에 기병에 발맞춰 기동하며 화력으로 지원하거나, 전선의 요충지를 신속히 점령해 그 자리에서 적을 포격할 수 있었다.
최초의 기마포병은 1759년 4월에 창설되었다. 6파운드포 6문을 운용했고 병력은 45명이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재앙이었던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재편성되었고, 동시에 두 번째 기마포병 부대도 만들어졌다.
그 뒤로 기마포병의 발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바이에른 계승전쟁이 시작된 1773년에는 포 6문으로 구성된 기마포병 중대가 편성되었으며, 포당 9명의 승무원을 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