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미슈마르 하메크 전투: 300명의 유대인 방어군이 격파한 1,000명의 아랍 해방군

미슈마르 하메크 전투: 300명의 유대인 방어군이 격파한 1,000명의 아랍 해방군

전투의 배경

미슈마르 하메크 전투는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으로도 알려진 제1차 중동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였다. 1948년 4월 초, 파우지 알카우지(Fawzi al-Kawji)가 지휘하는 약 1,000명의 아랍 해방군이 이곳의 유대인 키부츠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키부츠는 예닌-하이파 도로를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170명의 유대인이 방어를 맡고 있었으나, 하가나(Haganah) 민병대의 정예 부대인 팔마흐(Palmach) 두 개 중대가 합류하면서 방어군은 약 300명으로 늘어났다.

압도적인 열세 속의 방어

그러나 아랍군은 3:1의 수적 우위에 더해, 시리아군으로부터 공여받은 포문 7문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유대인들은 기관총 단 한 정만 가지고 있었을 뿐, 모든 대원에게 총기를 지급할 만큼 소총조차 부족한 실정이었다.

아랍군은 불과 800m 거리에서 포격을 시작했고, 이 포격은 5일간 계속되었다.

첫 공격의 좌절

4월 4일, 방어군이 궤멸되었다고 확신한 아랍군은 드디어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전날 밤 하가나 한 개 중대가 간신히 방어선에 합류하는 데 성공했고, 이것이 방어의 기둥이 되었다. 결국 아랍군의 공격은 격퇴되고 말았다.

다음 날 아랍군은 다시 포격을 퍼부었지만, 감히 지상 공격을 재개하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아랍군의 태세는 소극적이고 위축되어 있었으며, 이는 유대인들에게 움직일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하여 키부츠에서 5km 떨어진 지점에 유대인 부대가 집결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랍군 역시 병력을 증강했지만, 키부츠를 점령할 기회는 빠르게 사라져갔다. 4월 7일, 영국이 24시간 휴전을 제안했고, 아랍군은 유대인들에게 무기 항복을 요구하면서 휴전을 수락했다.

반격의 시작

유대인들은 당연히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휴전을 틈타 여성과 아이들이 먼저 키부츠를 빠져나갔다. 한편 방어군은 하가나 병력과 함께 반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반격은 4월 8일 밤부터 9일로 넘어가는 시간에 개시되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인근 마을의 4분의 1을 점령한 뒤 폭파했다. 아랍 주민들은 이미 떠난 상태였고, 유대인들은 남은 건물들도 차례로 파괴해 나갔다.

이후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지만, 4월 10일까지 하가나 부대가 승기를 잡았다. 유대인들은 마을의 나머지 집들이 아랍군의 거점으로 활용되지 못하도록 모두 폭파해 버렸다.

미슈마르 하메크 전투: 300명의 유대인 방어군이 격파한 1,000명의 아랍 해방군

아랍 전사들.

역습의 확장과 지역 장악

유대인들은 공세를 멈추지 않고 4월 12일까지 인근 두 개 마을을 추가로 점령했다. 그중 한 마을의 아랍 주민 230명은 떠나는 것을 허용받았고, 다른 마을은 이미 비어 있었다.

한편 알카우지의 부대는 포위될 위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4월 12일 밤부터 13일로 넘어가는 동안 유대인들은 또 두 개의 마을을 점령했고, 아랍 병사들은 후퇴했다. 유대인들은 점령한 마을들을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이어 5월 12일까지 다섯 개 마을을 추가로 함락시키며 이 일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미슈마르 하메크 전투: 300명의 유대인 방어군이 격파한 1,000명의 아랍 해방군

정예 유대인 부대.

미슈마르 하메크 전투: 300명의 유대인 방어군이 격파한 1,000명의 아랍 해방군

키부츠의 유대인 방어자들. 한 명은 엽총을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