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망 드 비녜로(Armand de Vignerot), 3대 리슐리외 공작은 남다른 인물이었다. 이름난 추기경이자 재상이었던 리슐리외의 후손이자, 국왕 루이 14세가 친히 대부 노릇을 하며 후견해 준 덕분에 그는 누구보다 강한 명예 의식을 지닌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미 결투 혐의로 한 번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 1734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는 폴란드 왕위 계승 문제를 빌미로 다시 한번 전쟁에 돌입했다. 프랑스군은 라인강변의 요새 도시 필립스부르크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흙투성이 군복으로 나타난 손님
프랑스군은 도시 주변에 포위용 참호를 파 놓았고, 리슐리외는 최전선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같은 부대에는 리신 공작(Prince de Lixin) 아내의 사촌과 젊은 콩티 공(Prince de Conti)도 함께 복무 중이었다. 어느 날 콩티 공은 전투 한가운데서도 생일을 축하하고 싶다며 귀족 출신 전우들을 모두 잔치에 초대했다.
리슐리외는 초대를 수락했지만, 참호에서 곧바로 온 탓에 먼지와 흙이 묻은 군복 차림 그대로 잔치장에 등장했다. 다른 귀족들은 그를 보고 히죽거리며 웃음을 터뜨렸고, 리신 공작은 이렇게 놀렸다. "결혼까지 했으면서도 아직도 몸에 흙을 잔뜩 묻히고 다니는군!"
포탄 세례 속에서 시작된 결투
리슐리외는 이런 모욕을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리신 공작에게 결투를 청했다. 두 결투자는 시종들과 따라온 구경꾼들을 대동한 채, 적에게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인들이 횃불을 밝히자 결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포위된 도시 안의 독일군이 저만치 번쩍이는 횃불을 발견하고는, 기습이 준비되고 있다고 판단해 결투자들과 그 일행에게 포격을 퍼부었다! 이윽고 포탄 한 발이 불운한 하인 하나를 쓰러뜨렸지만, 결투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리신 공작이 리슐리외에게 부상을 입혔을 때조차 결투는 멈추지 않았다.
집요하기 짝이 없던 리슐리외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고, 독일군의 포탄이 머리 위로 빗발치는 가운데 마침내 상대의 심장에 검을 깊이 찔러 넣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남은 것을 신께 큰소리로 감사드리면서, 리슐리외는 병원으로, 리신 공작은 무덤으로 옮겼다.
왜 하필 적의 포화 아래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 프랑스군에서는 결투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결투가 군대를 집어삼키는 만연한 폐단이 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두 결투자는 누구도 결투를 의심할 수 없는 장소, 다시 말해 적의 포화가 쏟아지는 최전선에서 승부를 벌이기로 한 것이었다.

명예를 위해선 목숨도 아까지 않았던 3대 리슐리외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