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반란: 죽음을 마주한 자들의 필사적 저항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반란: 죽음을 마주한 자들의 필사적 저항

유대인 절멸을 위한 '라인하르트 작전'의 핵심 수용소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 대량 학살을 위해 추진한 '라인하르트 작전(Operation Reinhardt)'에 따라 설립된 세 개의 절멸수용소 중 하나였다. 1942년 7월 23일 바르샤바 북동쪽 숲속에서 가동을 시작했으며, 이곳에서 약 70만~90만 명의 유대인과 약 2,000명의 로마(집시)가 살해되었다. 트레블링카는 아우슈비츠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독일 수용소였다.

저항 조직의 결성

처음에 독일군은 이송된 모든 유대인을 즉시 살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를 살려두어 '노동'을 수행하는 부대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절멸수용소에서 탈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저항 조직의 핵심을 형성했다.

비밀 조직의 지도자는 폴란드군 대위 출신의 유대인 포로 율리안 호롱지츠키(Julian Chorążycki)였다. 이후 젤리미르 블로흐, 루돌프 마사리크, 군의관 베렉 라흐터 등 여러 인물이 참여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반란 계획과 좌절

포로들은 1943년 6월 15일에 봉기를 결정했지만, 한 포로가 수류탄을 들고 홀로 돌격을 감행하면서 계획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 이후 독일군은 트레블링카로 보내는 피해자 수를 크게 줄였고, 이미 죽은 자들의 시신을 화장하는 임무만을 남겼다.

1943년 8월 2일, 반란의 시작

마침내 1943년 8월 2일 반란이 일어났다. 타이밍은 완벽했다. 쿠르트 프란츠(Kurt Franz) 중위가 이끄는 무장친위대(SS) 요원들과 우크라이나인 경비병 40명이 수영을 하러 자리를 비운 상태였던 것이다. 포로들은 경비병 무기고의 잠금장치를 열어 소총 20~25정, 수류탄 20발, 권총 여러 정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직후 약 700명의 포로들이 공격에 나섰다. 첫 단계에서 그들은 수용소 건물에 불을 질렀고, 연료 탱크를 폭파하며 각종 시설에 방화했다. 한 무리는 수용소 정문을 공격했고, 다른 이들은 울타리를 넘어 탈출을 시도했다.

잔혹한 진압과 탈출

약 25명의 독일인과 60명의 우크라이나인 경비대는 즉각 기관총과 소총으로 응사해 반란군 대부분을 살해했다. 겨우 200명만이 수용소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전화선을 끊는 데 실패하면서 독일군은 즉시 증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

도주자들에 대한 추격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탈출자의 약 절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했다. 폴란드 국내군(AK) 게릴라들이 일부 도주자를 구조했고, 다른 이들은 폴란드 마을로 피신했다. 어떤 이들은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고, 어떤 이들은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결국 약 70명, 즉 10명 중 1명만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존했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그것은 지옥이었습니다. 완전한 지옥이었죠. 정상적인 사람은 생명체가 어떻게 그런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태어난 살인마들이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생존자 칼만 티그만(Kalman Tiegman)은 2012년 세상을 떠나기 전 이렇게 회고했다. 또 다른 생존자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끔찍한 방식으로 잃고 혼자 살아간다는 정신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트레블링카 수용소는 반란 이후 잠시 동안만 더 운영되었다. 이후 독일군은 수용소를 완전히 파괴하고 모든 흔적을 지우려 했으나, 역사는 그들의 만행을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