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갈리칸주의와 종교 통합
루이 14세는 갈리칸주의(Gallicanism)의 확고한 지지자였다. 갈리칸주의란 교황의 간섭으로부터 독립하면서도 하나의 기독교 국가로 통합된 프랑스를 지향하는 사상이다. 1660년 12월 13일, 국왕은 얀센주의(Jansenism)를 근절하겠다고 의회에 공언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1671년, 교회 평화 이후 시몽 아르노 드 퐁본(Simon Arnauld de Pomponne)을 국무장관으로 기용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루이 14세는 프로테스탄트와 성체협회(Compagnie du Saint-Sacrement)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맞섰다. 즉위 초기에는 교황청과 여러 차례 갈등을 빚기도 했는데, 1662년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게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위협까지 가했다. 그러나 태양왕의 치세는 1684년을 기점으로 점차 종교적 색채가 짙어졌다. 1683년 왕비 마리 테레즈와 재상 콜베르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고, 엄격한 신앙심으로 알려진 만테농 부인(Madame de Maintenon)이 군주의 비밀스러운 아내가 된 것이다. 만테농 부인은 낭트 칙령 폐지를 강력히 지지했던 인물로 전해지지만, 오늘날 이 주장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점차 재검토되고 있다.
낭트 칙령의 폐지
1598년 4월 13일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낭트에서 서명한 낭트 칙령은 프로테스탄트에게 일정한 범위 안에서의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고, 일부 군사 요새의 보유권까지 인정했다. 그러나 칙령의 군사적 측면, 곧 프로테스탄트가 요새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은 이미 1629년 알레 평화 조약을 통해 루이 13세 치세에 철폐된 바 있다. 마침내 1685년 10월, 루이 14세는 대법관 미셸 르 텔리에(Michel Le Tellier)의 부서를 받아 퐁텐블로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낭트 칙령의 종교적 측면마저 폐지했다. 이로써 프로테스탄트는 프랑스 영토 내에서 금지되었다.
이 폐지 조치는 수많은 위그노(Huguenot)의 망명으로 이어졌다. 그들이 택한 피난처는 잉글랜드,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국,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칸톤, 그리고 네덜란드 연합공화국과 케이프타운 같은 그 식민지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이었다. 망명자 수는 약 2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숙련된 장인이거나 부르주아 계층이었다. 한편 가장 가난한 프로테스탄트들은 1679년부터 이미 '용기병 박해(dragonnades)'라 불리는 강제 개종 정책의 시달림을 받아 왔다.
결국 가톨릭이 복원되고 프로테스탄트 예배당들은 가톨릭 교회로 바뀌었지만, 다수의 개종자에게 가톨릭 신앙은 피상적인 것에 그쳤다. 미셸 모리노(Michel Morineau)와 재닌 개리슨(Jannine Garrisson)의 최근 연구는 폐지가 가져온 경제적 후폭풍을 크게 수정하고 있는데, 실제로 1686년 프랑스 경제는 특히 호황을 누린 것으로 확인된다. 오히려 유럽 각지에 형성된 프랑스인 디아스포라는 새로운 수출 시장을 열어 주었을 뿐 아니라, 이후 한 세기에 걸쳐 프랑스어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발판이 되었다.
낭트 칙령 폐지는 또한 랑그독 지방의 프로테스탄트 봉기라는 간접적 결과를 낳았으며, 그 정점이 바로 카미자르 전쟁이었다. 참고로 루이 14세 시대의 프로테스탄트는 프랑스에서 소수 집단이었으며, 16세기 종교전쟁 시기를 포함해서도 프랑스 인구의 10%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번 폐지는 프랑스 내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제한하고 가톨릭으로의 점진적 개종을 이끌어냈다.
'길들여진' 귀족과 종교
루이 14세는 귀족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종교 역시 함께 '길들였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에 많은 귀족이 프로테스탄트를 자처했던 것은 칼뱅주의에 진심으로 귀의한 일부를 제외하면 신앙보다는 정치의 문제에 가까웠다. 루이 14세는 귀족 파벌 간의 세력 균형 위에 궁정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상당수의 프로테스탄트 귀족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궁정에서 지위를 얻으려면 왕의 종교, 즉 가톨릭으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상징적 차원에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엘리자베트 라브루스(Elisabeth Labrousse)가 폐지 연구에서 명쾌하게 정식화한 원칙, 곧 프랑스 왕국은 '한 왕,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이라는 유일무이한 질서 아래에만 존재해야 한다는 이념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마자랭의 죽음 이후 루이 14세는 대신들의 지원 아래 1598년 군주제가 프로테스탄트에게 부여했던 특권들을 단계적으로 축소해 나갔고, 끝내 그 칙령을 실질적으로 공허한 문서로 만들었다. 요컨대 낭트 칙령의 폐지는 군주의 일시적 변덕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도자와 카리스마 있는 논객을 잃은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독실한 신자든 갈리칸파든 심지어 얀센파든 가톨릭 진영이 동원한 선전과 조직적 수단에 더 이상 대항하지 못한 채 겪게 된 느리고 잔잔한 비극의 귀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