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6년, 나폴레옹은 4만 병력의 이탈리아군을 이끌고 북부 이탈리아 전역을 지휘하고 있었다. 몽테노테에서의 승리에 힘입어 프랑스군은 데고(Dego) 점령에 나섰다. 쉽게 해결될 것으로 예상된 작전이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나폴레옹은 앙드레 마세나 장군의 사단을 데고 점령에, 피에르 오제로 장군의 사단을 인근 밀레시모(Millesimo) 점령에 배치했다. 당시 밀레시모에는 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 장군 조반니 디 프로베라가 지휘하는 축소 편제의 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코세리아 성으로의 최후 철수
프로베라가 보유한 병력은 소규모였다. 주력은 굴라이 자유군단 소속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여기에 제27보병연대의 두 개 척탄병 중대,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합류한 피에몬테 왕국 연합군 제3척탄병 대대가 증원 부대로 더해져 있었다. 오스트리아 장군은 프랑스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낼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병력을 폐허가 된 코세리아(Cosseria) 성으로 옮겨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4월 13일, 자신만만했던 공격
1796년 4월 13일, 나폴레옹은 즉시 오제로와 뫼니에 사단에 오스트리아군 및 이탈리아 동맹군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프랑스군은 산병들의 엄호 아래 종대 대형으로 전진했고, 소수의 적을 상대하는 이상 승리는 자명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방어군은 프랑스군의 낙관에 동조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이 돌진하는 순간 집중 사격으로 맞대응하며 그들을 쓰러뜨렸다. 부상을 입은 프랑스 대령 주베르는 "이보다 끔찍한 공격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압도적 열세 속의 치열한 저항
전력 차이는 극명했다. 오제로는 병력 9,000명과 대포 23문을 보유했던 반면, 프로베라가 거느린 병력은 겨우 988명, 대포는 2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프랑스군은 하루 종일 공격을 퍼부었지만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했고, 해 질 녘이야 겨우 오스트리아군 진지 일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베라를 진정한 위기로 몬 것은 진지의 상실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진지는 결정적인 요충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탄약과 얼마 남지 않은 식량, 그리고 무엇보다 물이 바닥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결국 다음 날, 오제로가 성의 항복을 요청하자 프로베라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값비싼 대가와 나폴레옹의 '속임수'
프랑스군의 손실은 막대했다. 오스트리아·이탈리아군의 사상자가 96명에 불과한 반면,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700명을 넘어섰다. 만약 이 전투가 나폴레옹의 '속임수' 중 하나와 얽혀 있지 않았다면,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계획 실행의 지연과 손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파리 정부에 '치열했던 밀레시모 전투'를 과장해 보고했다. 훗날 그는 식량과 물 부족으로 어차피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참호 속 적에게 공격을 명령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뚜렷한 이유 없이 병사들을 희생시키는 길을 택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케니 장군과 바네 대령을 잃었고, 피에몬테 제3척탄병 대대의 용감한 지휘관 델 카레토 역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