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12월 3일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결말로 방글라데시(당시 동파키스탄)의 독립이 확정되었다. 인도는 주적을 약화시키기 위해 교란 작전을 한층 강화할 명분과 이해관계를 모두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충돌은 공식적인 전쟁 발발보다 훨씬 이른 시점, 즉 1971년 10월부터 국경에서 심각한 무력 충돌이 이어지며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본격적인 첫 대규모 교전은 11월 20일부터 21일까지 갈리부르(Garibpur)에서 벌어졌다. 이곳에서 인도군 1개 대대는 경전차 14대의 지원을 받아 파키스탄군 1개 여단과 정면으로 맞섰다.
포병 거점이 된 월경지, 갈리부르
갈리부르는 오늘날 방글라데시에 해당하는 보이라(Boyra) 월경지에 위치해 있다. 파키스탄군은 이 월경지를 인도군에 대한 포병 공격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인도는 이곳이 파키스탄군의 전진기지로 계속 쓰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점령을 결심했다.
작전은 소련제 PT-76 수륙양용 경전차 14대를 장비한 제45기병연대 C중대의 지원을 받는 제14펀자브 대대가 담당했다. 인도군은 최대한 기습에 가까운 형태로 공격을 감행하려 했다.
11월 20일 저녁, 제14펀자브 대대는 지역 정찰을 위해 순찰대를 전방에 파견했다. 그러나 인도 순찰대는 파키스탄 순찰대와 마주치면서 기습의 선수를 잃고 말았다. 이후 인도 지휘관 싱(Singh) 중령은 대대에 진격을 명령했다.
전투의 시작
11월 21일 새벽 3시, 인도군이 공세에 나섰다. 대대의 4개 중대는 경전차의 지원 아래 치열한 전투 끝에 파키스탄군의 첫 번째 진지를 점령했다. 직후 싱 중령은 부대에게 점령한 진지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동이 트면 올 것으로 예상되는 파키스탄군의 역공에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싱 중령의 예상대로 파키스탄군은 자신들의 여단 전체, 즉 제107보병여단을 동원했고, 여기에 M24 채피 경전차를 운용하는 독립 전차부대까지 증원했다. 길(Gill) 대위가 이끄는 인도 순찰대가 파키스탄 증원부대의 도착을 포착해 싱 중령에게 보고했다.
싱 중령은 무반동포로 증강된 보병을 진지에 남겨두고, C중대에게 전진하여 다가오는 적을 매습하라고 명령했다. 날이 밝으며 짙은 안개가 일대를 뒤덮었다. 인도군은 이를 역이용해 사격을 개시했고, 안개 속에서 피격 지점조차 파악하지 못한 파키스탄군은 크게 혼란에 빠졌다.
궤멸한 파키스탄 전차부대
파키스탄 전차부대는 문자 그대로 소멸했다. 전차 11대가 파괴되었고 3대는 가동 가능한 상태로 노획되었다. 인도군은 6대, 다른 기록에 따르면 8대의 전차를 잃었으며, 여기에는 C중대장 나랑(Narang) 소령의 전차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인도 진지에서 불과 25m까지 근접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지를 돌파하려는 시도는 모두 격퇴당했다. 결국 파키스탄군은 최소 180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후퇴했다. 부상자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인도군의 전사자 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약 40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중전
파키스탄 제107여단의 공격 과정에서 파키스탄 공군도 개입해 F-86 세이버 전투기로 인도 진지를 타격했다. 오후 2시 30분, 또 다른 공격을 위해 파키스탄 F-86 3대가 상공에 나타났다. 그러나 바로 그때 인도 놋(Gnat) 전투기 3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도 편대는 로이 앤드루 매시(Roy Andrew Massey) 중위가 이끌었다. 파키스탄 조종사들은 적기를 발견하지 못했고, 인도군은 지상군을 타격하기 위해 급강하한 뒤 고도를 회상하려던 순간을 틈타 공격에 나섰다.
파키스탄 세이버기들은 영국제 소형 인도 전투기의 20mm 기관포 집중 사격에 몰렸다. 두 대의 파키스탄기는 즉시 격추되었다. 나머지 한 대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만 불타는 채로 기지까지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양측 병사들이 이 공중전을 지켜봤고, 그 결과는 인도군의 사기를 크게 높이는 반면 파키스탄군의 사기에는 타격을 주었다. 인도에게 이날은 지상과 공중에서 거둔 위대한 승리였다.

PT-76 경전차에 탑승한 인도 군인들.

격추되는 파키스탄 세이버 전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