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새로운 군사 명장의 탄생… 1683년 빈 공방전에서 빛난 외젠 드 사부아

새로운 군사 명장의 탄생… 1683년 빈 공방전에서 빛난 외젠 드 사부아

외젠 드 사부아(Eugène de Savoie)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프랑스군에서 복무했고, 외젠 역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외젠은 부득불 오스트리아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선택을 뒷받침해 준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형이 이미 오스트리아군 장교로 복무 중이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1683년 오스만 제국(투르크)의 대군이 빈의 성문 앞까지 몰려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헝가리 반란과 오스만 대군의 침공

1682년, 오스트리아 지배 하에 있던 헝가리 지역에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에메리 퇴쾨리(Emery Tokoly) 백작은 수많은 동포들을 규합해 오스트리아에 맞섰고, 심지어 헝가리를 오스만 제국의 '보호' 아래 두겠다는 조건으로 투르크의 원조를 요청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물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Kara Mustafa)가 이끄는 20만~25만에 달하는 거대한 오스만 군대가 오스트리아 영토를 침공했습니다. 황제 레오폴트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가하는 위협에 대응하는 데 온 신경을 쏟느라 동부 국경을 방비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페트로넬 전투의 참패, 그리고 빈 포위

급하게 소집한 병력이 겨우 1만 8,500명에 불과했던 오스트리아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페트로넬 전투(1683년 7월 5일)에서 자연스럽게 패배했습니다. 이틀 후 프레스부르크(현 브라티슬라바)마저 오스만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제 오스만군과 빈 사이에는 아무런 방어선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7월 17일, 오스만 군대는 도시에 대한 조직적인 포위전을 개시했습니다.

황제는 떠나고, 기독교 연합군이 집결하다

황제 레오폴트는 이미 도시를 떠난 뒤였고, 빈의 방어는 슈타렌베르크 백작과 1만 8,000명의 수비병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일련의 외교적 접촉이 진행되면서 오스트리아·폴란드·독일로 구성된 대투르크 연합군이 결성되었습니다. 9월 3일, 7만 8,000명의 병력이 집결해 폴란드 왕 얀 3세 소비에스키(John Sobieski)의 지휘 아래 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포위를 돌파해 빈을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외젠은 용기병(dragoon) 연대—훗날의 제3용기병연대—에 장교로 입대해 이 전역에 합류했습니다. 9월 12일, 기독교 연합군은 투르크 포위군과 마주 보는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외젠의 연대는 카프라라와 작센 장군의 지휘 아래 연합군 최 좌측에 배치되었고, 이날 오전 6시 기독교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누스베르크 언덕을 두고 벌인 사투

오스트리아군은 연합 진영의 최 좌측에 위치해, 오스만군 중 가장 강력한 측면과 정면으로 맞서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서서히 전진을 개시했지만, 울퉁불퉁한 지형 탓에 신속한 기동이 어려웠고, 오히려 오스만군 소속 보스니아 저격수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용기병들은 누스베르크(Nussberg) 언덕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도보로 보스니아 병사들과 교전을 벌였고, 4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마침내 적을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투르크 기병대가 개입해, 맹렬한 돌격으로 오스트리아군을 전복시켜 언덕 뒤로 내던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용기병들은 보병과 긴밀히 협동하여 집중 화력으로 투르크군을 분쇄했습니다. 오후 1시 무렵, 외젠이 함께 싸우던 오스트리아 선봉 부대는 디블링 마을에 도달해 투르크군을 격퇴했고, 포위된 빈에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여기서 행진을 멈추고 폴란드·독일 동맹군이 진형을 맞추기를 기다렸으며, 이는 오후 4시경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전군이 하나 되어 다시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완승과 함께 시작된 명장의 여정

오스트리아군은 용기병 연대를 선봉으로 삼아 투르크군의 우익을 돌파한 뒤 우측으로 선회, 투르크 중앙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어진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투르크군은 완전히 붕괴했습니다. 이슬람의 성물인 '예언자의 깃발'마저 승자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유럽은 비잔티움의 멸망이라는 운명을 피하게 된 것입니다.

젊은 외젠은 빈 전투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으며, 군사적 재능이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이후 오스만 제국을 몇 번이나 꺾으며 유럽 군사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명장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