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정적 회전은 아니었지만 남긴 교훈은 컸다
1645년 5월 2일 벌어진 메르겐트하임 전투는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대규모 회전은 아니었다. 프랑스군 측에는 훗날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튀렌(Turenne) 원수가, 제국-바이에른 연합군 측에는 로렌 출신의 프란츠 폰 메르시(Franz von Mercy)가 지휘하는, 두 소규모 군대 간의 전술적 충돌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최고의 지휘관조차 패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명한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바이에른 침공과 깊은 추격
1645년 프랑스군은 바이에른으로 진격했다. 바이에른군은 프랑스의 침공에 대비해 병력을 정비할 겨를도 없었다. 합스부르크 동맹국을 지원하기 위해 이미 4,000명의 병력을 차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대의 어려움을 파악한 튀렌은 병력 11,000명과 대포 15문을 이끌고 바이에른으로 진입했다. 그는 바이에른군이 피신한 뷔르템베르크까지 추격해 들어갔고, 메르시와 그의 6,000명 부대를 그곳에서 몰아낸 뒤 프랑켄 동부의 메르겐트하임까지 밀어붙였다. 이 도시는 수 세기 동안 유명한 튜턴 기사단(독일 기사단)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치명적인 오판
튀렌은 적을 계속 추격했지만, 병사들의 극심한 피로를 고려해 해당 지역에 야영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부대를 주변 마을들에 분산 배치해 휴식을 취하게 하고, 동맹국 헤센에서 오는 증원군을 기다렸다.
추격 중단과 군대의 분산 배치는 튀렌이 저지른 심각한 실수였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멀리까지 몰아붙인 메르시의 바이에른군이 공세적으로 되돌아올 위험은 무시해도 된다고 여긴 듯했다. 긴 후퇴 끝에 적군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고, 자기 부대만큼 지쳤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새벽 2시의 기습 역습
그러나 로렌 출신의 독일 장군 메르시는 튀렌의 낙관론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과감히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1645년 5월 2일 새벽 2시, 튀렌은 독일군이 역습에 나섰다는 보고에 잠에서 깼다. 그는 즉시 로젠(Rosen) 장군에게 헤르프스트하우젠(Herbsthausen)에서 군대를 집결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로젠의 부대는 메르시 군의 공격을 받았다. 메르시는 포 9문의 일제 사격에 이어 프랑스군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로젠이 겨우 모은 3,000명은 이미 증원을 받아 9,600명으로 불어난 독일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튀렌 역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프랑스군은 먼저 보병이, 이어서 기병이 와해되며 완전히 붕괴했다.
패배의 대가와 명장의 최후
튀렌은 포로로 잡힐 뻔했고, 간신히 탈출해 헤센카셀로 피신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당시 프랑스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마자랭 추기경은 '대왕'(le Grand Condé)이라 불린 콩데 공작에게 대군을 맡겨 서부 독일로 파견했다.
1645년 8월, 콩데는 제2차 뢰르딩겐(Nördlingen) 전투에서 독일군과 격돌했고, 이 전투에서 메르시는 전사했다. 그의 상대였던 프랑스군은 전장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 적진에서도 존경을 받았던 명장의 최후를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