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세기 유럽의 드문 현상, 그러나 '국민 혁명'이라 불릴 봉기
17세기 유럽에서 민중 봉기는 일반적으로 매우 드문 현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통상 알려진 것보다 훨씬 자주 발생했다. 그중에서도 1705년 바이에른 농민들이 오스트리아 정복자들에게 들고 일어난 봉기는 '국민 혁명(national revolution)'이라 불릴 만한 성격을 지닌 특별한 사건이었다.
블렌하임 대승과 바이에른 점령
1704년, 말버러 공작(Duke of Marlborough)과 외젠 공자(Prince Eugene)가 이끄는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과 독일 제후국·네덜란드군은 바이에른의 블렌하임(Blenheim)에서 프랑스군과 바이에른군을 상대로 화려한 대승을 거두었다. 승리 직후 연합군은 바이에른 통치자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국토를 잔혹하게 약탈했다.
바이에른의 군주 막시밀리안 에마누엘(Maximilian Emanuel)은 프랑스로 피신했고,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독일 연합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봉기의 시작
그러나 1705년 11월 초, 바이에른인들은 마침내 정복자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인(Inn) 강 유역에서 하부 및 동부 바이에른 지역의 주민들이 봉기를 시작했으며, 반란은 점차 도나우(Danube) 강까지 상팔츠(Obere Pfalz)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브라우나우 의회와 오스트리아의 방관
12월 21일, 바이에른 혁명가들은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자체적인 의회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초기에는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약 두 달간 소극적으로 대응했는데, 이는 오히려 반군에게 진영을 다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수도 뮌헨 공격을 시도하자 오스트리아군은 즉각 반응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학살
1705년 크리스마스 이브, 뮌헨으로 진격하던 반군 부대는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위치가 발각되고 말았다. 병력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군은 과감히 공격을 감행했다. 훈련받지 못한 시민들은 정규군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고 곧바로 흩어져 버렸다. 이 과정에서 1,100명이 넘는 반군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으며, 이 참극은 이른바 '크리스마스 학살(Christmas Massacre)'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의 피해는 겨우 40명에 불과했다.
아이덴바흐 전투와 혁명의 붕괴
얼마 지나지 않은 1706년 1월 8일, 1,300명 규모의 오스트리아 소수 부대가 아이덴바흐(Aidenbach)에서 7,000명의 반군과 조우했다. 전투 결과는 바이에른 측의 완전한 패배였다. 바이에른군은 약 3,000명의 사상자를 전장에 남겼고, 오스트리아군의 손실은 300명에 그쳤다. 이 결정적인 패배 이후 혁명은 완전히 붕괴했다.
1월 11일, 혁명가 대표단은 오스트리아 측에 적대 행위의 중지를 요청하며 나섰다.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이후 며칠 안에 반군이 장악하고 있던 마지막 도시들이 차례로 항복했다. 아이덴바흐 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했던 혁명 지도자 요한 호프만(Johann Hoffmann) 역시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크리스마스 학살을 묘사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