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3년 빈 성벽 앞에서 기독교 연합군이 거둔 대승은 유럽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승리의 여파 속에서 벌어진 파르카니 전투(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슈투로보)는 역사상 가장 흥미롭고도 특이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전투는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시도였으며,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첫 번째 단계는 오스만군에게 그저 허황된 환상에 불과했다.
빈 성벽 아래서 무너진 15만 대군
카라 무스타파가 이끄던 15만 명의 오스만 대군이 빈 성벽 앞에서 참패하자, 그 충격은 제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패주한 병력 일부는 카라 메흐메트 파샤의 지휘 아래 당시 헝가리 영토였던 파르카니로 물러났고, 그곳에서 헝가리 동맹 임레 퇴쾨리의 부대와 합류했다.
소비에스키의 무모한 기병 돌격
1683년 10월 6일 저녁, 얀 3세 소비에스키 국왕이 이끄는 폴란드군이 파르카니에 도착해 적을 발견했다. 소비에스키는 기병만으로 즉각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기습을 노리며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오스만군은 최소 세 배 이상 많았고, 폴란드군은 곧 압도당해 1,000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로렌 공작 샤를의 적시 개입
폴란드군은 로렌 공작 샤를이 지휘하는 독일 제국군의 적시 개입 덕분에 완전한 궤멸을 면했다. 제국군은 오스만 기병을 격퇴했지만 즉시 반격에 나서지는 않았다. 샤를 공작은 휘하 병력이 16,700명에 불과해 군대가 궤멸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병력을 재정비하고 휴식을 취하게 한 뒤, 10월 9일 아침 공격 준비를 마쳤다.
삼열 진형으로 완성된 결전의 그림
샤를은 병력을 세 열로 배치했다. 보병 7,600명은 빈 방위전의 영웅 에른스트 뤼디거 폰 슈타렘베르크 장군의 지휘 아래 중앙에 섰고, 좌우에는 제국 기병이 배치되었다. 가장 바깥쪽 익은 폴란드군이 담당했는데, 우익은 소비에스키가, 좌익은 야블로프스키 장군이 맡았다. 제국 기병 우익(4,500명)은 '튀르크인 루이'라 불린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가, 비슷한 규모의 좌익은 뒤네발트 장군이 지휘했다.
알라를 부르며 돌격했지만…
기독교 연합군이 공격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본 카라 메흐메트는 선수를 쳐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기로 결심했다. 알라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오스만군은 야타간 검을 들고 우레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신은 자신의 신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적을 도우고 있는 듯했다. 오스만군의 공격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즉각적으로 이어진 기독교군의 반격은 카라 메흐메트의 부대를 완전히 궤멸시켰다.
1만 명의 전사, 학살로 끝난 전투
카라 메흐메트 휘하 18,000명 중 10,000명이 살해당했고, 포로로 잡힌 것은 겨우 3,000명에 불과했다. 빈 공방전 과정에서 오스만군이 자행한 만행 때문에 기독교군은 더 이상 터키인 포로를 너그럽게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잔여 병력만이 승자들의 끊임없는 추격을 뿌리치며 후퇴할 수 있었다. 반면 두 번째 전투에서 기독교군의 손실은 문자 그대로 미미해, 사망자는 소수에 불과했고 부상자도 극히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