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7년 시작된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이듬해 합스부르크 제국이 러시아 편에 가담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 전쟁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 가운데 포크샤니 전투는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거둔 가장 중요한 승리 중 하나로 꼽힌다.
1789년 한여름, 유능한 지휘관 작센코부르크 공작 요시아스(Josias von Sachsen-Coburg)가 이끄는 18,000명 규모의 오스트리아군이 주로 방어 임무를 맡아 오늘날의 루마니아 지역에 파견되었다. 여기에 알렉산드르 수보로프(Alexander Suvorov) 장군 휘하의 7,000명 러시아군이 신속히 합류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이에 맞서 오스만 제국은 대재상 유수프 파샤(Yusuf Pasha) 아래 막강한 병력을 집결시켰다.
유수프 파샤는 내선 기동을 활용해 양군이 합류하기 전에 먼저 오스트리아군을 타격하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그는 30,000명을 맡긴 오스만 파샤(Osman Pasha)에게 포크샤니에서 북진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포크샤니는 경제적 요충지이자 무엇보다 중요한 교통 허브였다.
그러나 작센코부르크는 이미 튀르크 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고, 수보로프에게 최대한 빨리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실제로 러시아군은 단 28시간 만에 65km를 강행군하여 동맹군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의 시작
양군이 합류하면서 유수프 파샤의 계획은 무너졌고, 오스만 파샤는 도시 인근에 요새화된 진영을 구축하며 방어 태세를 갖췄다. 7월 31일, 연합군 경기병 정찰대가 튀르크 순찰대와 교전했고, 두 연합군 사령관은 적의 배치를 파악한 뒤 공격을 결행했다.
수보로프 휘하에는 3개 연대의 정규 보병과 1개 경보병 대대(각 2개 대대), 2개 척탄병 대대, 3개 용기병 연대, 그리고 코사크 경기병 분견대가 있었다. 작센코부르크는 4개 정규 보병 연대, 2개 그렌츠(Grenz) 경보병 연대, 4개 정예 척탄병 대대, 경용기병(Chevauxléger) 1개 연대, 3개 후사르 연대, 발칸 비정규병 분견대를 지휘했다.
오스만군과의 과거 교전 경험에서 수보로프와 작센코부르크는 기존의 선형 전술(linear tactics)이 통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종심 있는 대형만이 튀르크군의 초기 돌격을 버틸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두 장군은 보병을 '매스(mass)'라 불리는 밀집 종심 대형으로 편성했다. 이는 폐쇄형 방진과 치밀한 돌격 팔랑크스의 중간 형태였다.
이 대형은 지속적인 화망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필요 시 총검의 '숲'을 형성해 튀르크 기병의 진출 의욕을 꺾을 수 있었다. 동시에 응집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도 지녔다.
8월 1일, 매스 대형의 위력
1789년 8월 1일 아침, 연합군은 보병을 매스 대형으로 배치하고 대형 사이 넓은 간격을 경보병과 포병으로 덮었다. 1열 매스 사이 뒤편에는 2열 매스가 위치해, 필요 시 즉시 전진하여 단일 전선을 형성하거나, 1열이 밀릴 경우 응집력을 유지한 채 지원할 수 있었다.
오전 9시, 깃발이 나부끼고 북소리가 리듬을 이루는 가운데 연합군은 요새화된 튀르크 진영을 향해 전진했다. 오스만 파샤는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기병에게 적 보병을 돌파해 분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때 매스 대형이 진가를 드러냈다. 흔들림 없는 오스트리아·러시아 보병은 완벽한 안전 속에서 적에게 치명적인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정규 보병이 적 기병에게 위험했던 경우는 측면이나 후방이 노출될 때, 혹은 공포나 피해로 응집력을 잃었을 때뿐이었다.
매스 대형은 바로 이 점에서 강력했다. 적에게 측면도 후방도 내주지 않았고, 깊은 종심 덕분에 동요할 가능성도 낮았다. 큰 손실을 입은 튀르크 기병은 요새 진영 안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연합군은 멈추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군은 우익에서, 러시아군은 좌익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수보로프는 기병을 1제대로 투입했으나 격퇴당했고, 결국 보병 매스의 개입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우익에서는 정예 척탄병이 선두에 선 오스트리아군이 격렬한 총검·개머리판·도검전 끝에 튀르크 방어선을 돌파하고 진영에 돌입했다. 예비대를 오스트리아군 방면으로 돌린 오스만 파샤는 우측면이 약해졌고, 그 결과 러시아군 역시 요새화된 튀르크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양익이 모두 무너진 오스만 파샤에게는 전면 후퇴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다행히 기병 우위 덕분에 튀르크군은 질서 있게 후퇴할 수 있었고, 연합군 기병의 추격도 받지 않았다. 튀르크군의 피해는 4,000명에 달한 반면, 오스트리아·러시아군의 사상자는 800명에 불과했다. 연합군은 또한 튀르크군의 대포 12문을 노획했다.
그러나 튀르크군에게 더 처참한 운명이 곧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