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던 시절, 전선에서 60km 떨어진 후방의 한 폴란드 대위는 결사 항전의 시간이 왔음을 직감했습니다. 브와디스와프 라기니스(Władysław Raginis) 대위는 비즈나(Wizna) 지역에서 증강 대대 규모의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지주 가문 출신의 라트비아계 혈통인 그는 폴란드 국경수비대에서 복무했으며, 동프로이센과 접경한 비즈나 요새 지역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침공 당시 라기니스 휘하에는 낡은 러시아제 76.2mm 야포 6문, 대전차총 2정, 기관총 42정으로 무장한 약 800명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이 부대는 기관총 벙커와 경방거점(기관총과 대전차 무기 혹은 야포를 갖춘 방어 시설)들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한 시점에 요새화 공사는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설령 완공되었더라도, 소규모 수비대가 예상되는 독일군의 맹공세에 맞서 의미 있게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라기니스는 독일군의 진격을 한시적으로 늦출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 '전차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 군단 전체, 즉 병력 4만 명, 전차 350대, 야포와 박격포 657문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구데리안의 임무는 동프로이센에서 폴란드 방어선을 돌파해 북에서 남으로 진격, 비스툴라 강 서쪽에서 싸우고 있는 폴란드군 전체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6일간의 전투 끝에 독일군은 비즈나 일대의 나레프 강에 도달했습니다. 라기니스의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비즈나 전투
9월 7일 새벽, 폴란드 기병 순찰대가 비즈나로 향하는 독일 전차 부대를 발견했습니다. 기병대의 보고를 받은 라기니스는 즉시 부대를 전투 태세에 돌입시켰습니다. 독일군은 강 서안의 비즈나 마을을 쉽게 점령했지만, 폴란드군이 반격에 나서 동안으로 통하는 유일한 다리를 폭파하면서 독일군의 발걸음은 멈췄습니다. 항공 정찰 결과 동안 내륙 약 6km 지점에 방어 시설과 참호선이 펼쳐져 있음이 확인되었으나, 폴란드군의 병력과 무장 규모는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밤이 깃들자 독일 보병이 강 도하를 시도했습니다. 습지가 많은 지형 특성상 건널 지점을 찾아 헤매던 독일군은 문자 그대로 폴란드 기관총 화망에 정면으로 부딪혔고,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막대한 손실을 입은 독일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날 여명과 함께 독일 항공기가 나타났지만, 수비군에게 항복을 촉구하는 폴란드어 방송만을 송출했습니다. 라기니스와 부지휘관 브리칼스키(Brikalski) 중위는 모든 진지를 순회하며 병사들에게 "두 사람 중 누구도 살아서 방어 진지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독일군이 점령하는 폴란드 영토의 모든 땅은 침략자들의 피로 물들 것이라는 다짐이었습니다. 이후 독일 항공기들이 재등장했지만, 이번에는 폴란드 진지 위로 폭탄을 쏟아부었습니다.
동시에 독일군의 포병과 박격포도 공격 준비에 합류했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북쪽의 두 개 고립 포좀으로, 삼면에서 공격을 받아 거의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폴란드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이 지역을 방어하는 단 두 개 소대로는 무한정 버틸 수 없었고, 결국 후퇴를 강요당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습지 덕분에 독일군의 진격이 봉쇄되거나 거북이 걸음으로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폴란드군이 집중 사격을 퍼부으며 독일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겼습니다. 그럼에도 전차의 엄호를 받은 독일군은 조금씩 진지를 넓혀갔고, 폴란드군은 야포가 없는 전투 진지들을 포기해야 했지만 거점에서는 여전히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끝까지
해 질 녘, 독일 전차들은 폴란드 진지 후방까지 돌파했습니다. 하지만 독일 보병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라기니스에게는 증원이 불가능하며 독일 방어선 돌파 시도도 기대할 수 없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전투는 계속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전차포의 직접 사격으로 폴란드 기관총 진지를 하나씩 파괴해 나갔습니다. 9월 10일 아침에는 단 두 문의 야포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백기를 든 독일 군인이 나타났습니다. 라기니스는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승산은 없었고, 계속 싸운다는 것은 용감한 병사들 전원의 죽음만을 의미했습니다. 탄약은 바닥나고 있었고, 부상자들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는 전원이 독일군의 포격에 헛되이 산화하거나, 독일군이 예고했던 대로 항복 후 처형당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저항을 멈추기로 결심했습니다. 비록 스스로 중상을 입은 몸이었지만, 그는 병사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로 한 것입니다. 병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한 뒤, 그는 수류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720명의 폴란드군 중 생존자는 70명에 불과했습니다. 일부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어떤 포로들은 처형되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잔혹한 구타와 굴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중 얼마나 많은 이가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는지는 지금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독일군의 손실 또한 막대했습니다. 구데리안은 사망자 900명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폴란드군은 독일 전차 10대와 그보다 더 많은 장갑차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비즈나 전투는 '폴란드의 테르모필라이'로 불립니다...

영웅적인 폴란드 대위 브와디스와프 라기니스.

비즈나 전투의 모습.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파괴된 폴란드 기관총 진지.

비즈나에 주둔한 독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