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만 함대의 기습, 오트란토 포위
1480년 7월 28일, 무려 128척의 오스만(터키) 군함이 이탈리아 남부 도시 오트란토(Hydros)의 성벽 앞에 정박했습니다. 게디크 아흐메드 파샤(Gedik Ahmed Pasha)가 이끄는 1만 8천 명의 오스만군이 상륙하자마자 도시를 향한 격렬한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약 140명 규모의 소규모 수비대와 약 1만 7천 명의 주민들은 이런 공격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두 차례의 항복 권고 거부
오스만군의 맹공에 직면한 수비대와 주민들은 성벽을 버리고 도시의 요새로 후퇴했습니다. 수비대는 오스만군이 보낸 두 차례의 항복 권고를 모두 거부했으며, 상징적으로 도시의 열쇠를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후 오스만군은 강도 높은 포격과 지속적인 소규모 공격으로 수비병들을 소진시키려 했습니다. 마침내 1480년 8월 11일, 오스만군의 총공격이 개시되었고, 수비병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50명의 병사가 최전선에 서는 가운데 용맹하게 맞섰습니다.
요새 함락과 참혹한 학살
그러나 결국 버티지 못했습니다. 오스만군이 요새에 진입하면서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주교이자 수비대 사령관 스테파노스 아그리콜로스(Stefanos Agrikolos)는 성직복을 입고 십자가를 손에 든 채 프란체스코 라르고(Francesco Largo) 백작과 함께 도시 교회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교는 성단 위에서 참수당했고, 백작은 산 채로 톱질을 당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오스만군은 1만 2천 명이 넘는 주민을 학살하고, 약 800명의 남성을 포함해 5천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살리고 싶다면 이슬람으로 개종하라고 제안했습니다.
안토니오 프리말디의 외침
그때 한 사람, 재단사(어떤 기록에서는 방직공이라고도 함) 안토니오 프리말디 페줄라(Antonio Primaldi Pezzula)가 일어나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는 우리 도시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이제 주님께 영혼을 구원받기 위한 마지막 전투를 하자.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듯이, 우리 또한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의 말을 들은 포로들은 환호성으로 화답했습니다. 오스만군은 포로가 된 가족들을 돌려주겠다는 조건까지 내걸며 다시 개종을 종용했지만, 그들은 다시 한번 거부했습니다.
순교의 언덕
결국 8월 14일, 그들은 아테네 언덕(오늘날의 순교자 언덕)으로 끌려가 차례차례 참수를 당했습니다. 첫 번째로 참수된 안토니오 프리말디는 머리가 잘렸음에도 몸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땅에 쓰러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목격한 처형대장 베르사 베이(Bersa Bey)는 안토니오를 성인이라 불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게디크 아흐메드 파샤는 즉시 그를 체포하여 채찍형에 처했습니다.
도시 탈환과 시성
한편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드는 도시를 해방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마침내 1481년 봄, 헝가리군의 지원을 받아 도시는 탈환되었습니다. 참수당한 이들의 유해가 발견되었고, 참사의 생존자들은 순교자로서 그들을 추앙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로마 가톨릭 교회는 2013년 이들을 성인으로 시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