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팍 아마루 2세(Túpac Amaru II)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페루의 혁명가입니다.
그는 왕실 잉카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1738년 쿠스코에서 태어나 1781년 스페인에 대한 봉기가 실패한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마지막 잉카 왕은 우아하고 카리스마 있으며 교양이 깊은 인물로 묘사됩니다.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원주민 저항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20세기에는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투팍 아마루 2세를 그린 유화
생애와 배경
투팍 아마루 2세는 원주민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스페인인들 사이에서도 큰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는 '오로페사 후작(Marqués de Oropesa)'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쿠스코의 산 베르나르도 학교에서 교육을 마친 뒤, 툰가수카·수리마나·팜파마르카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부유한 그는 노새와 라마로 구성된 대규모 무리를 보유하며 도시 간 운송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1780년, 스페인의 세금 제도에 대한 반발이 그가 이끄는 최초의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식민지 수탈과 민중의 고통
메스티소와 스페인 식민지 주민들에게 '코레히도르(corregidor)'라 불리는 지방 관리들은 세금을 걷는 과정에서 가혹했고,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에서도 불공정했습니다.
스페인 왕정이 시행한 '미타(mita)'와 '오브라헤(obraje)' 제도 역시 커다란 불만을 낳았습니다. 이 제도 아래에서 원주민과 메스티소는 준노예 상태로 내몰렸습니다.
국고를 채우기 위해 스페인 왕실은 1776년부터 1787년 사이에 세금 징수 제도를 개혁했습니다. 새로운 제도는 스페인과 연결된 항구 도시들의 세수를 늘렸지만, 페루 같은 내륙 지역은 오히려 더 가난해졌습니다.
급성장하던 도시들은 산업 정체, 화폐 유통 감소, 과중한 세금 부담으로 인한 구매력 하락까지 겹치며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반란의 도화선
이러한 타격은 가난한 계층에게 집중되었고, 반란자들은 극단적인 폭력으로 억눌렸습니다. 반역자들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에 대한 불충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폭력에 더해 원주민들은 미타 제도에 더 많이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미타는 은광에서의 강제 노동을 의미했으며, 원주민들은 자유를 조건으로 광산에서 혹사당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노동량에도 불구하고 왕실은 주택과 공공건물 건설, 코카와 포도 재배를 위한 추가 노동까지 요구했습니다.
산악 지대에서 평원으로 강제 이주된 원주민들은 '기후 공격'이라 불리는 적응 과정을 겪으며 많은 이들이 질병과 체벌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투팍 아마루 2세는 1776년 직접 왕실 대표들에게 이러한 상황을 호소했지만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1778년 미타 제도에 반대하는 첫 봉기가 일어났으나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봉기와 잔혹한 최후
1780년 11월 10일, 투팍 아마루 2세는 지방 장관 안토니오 아리아가를 체포해 처형했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200명의 병력이 쿠스코로 파견되었고, 그는 도시의 항복을 협상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봉기는 이미 확산되어 아르헨티나까지 번졌고, 6만 명의 원주민이 참여했습니다. 이는 본격적인 독립 과정 이전 스페인이 벌인 마지막 대규모 학살이 되었습니다. 스페인 측은 원주민들보다 무장이 잘 갖춰진 17,000명의 병사를 동원했습니다.
투팍 아마루 2세의 군대는 1781년 4월 6일 패배했습니다. 지도자는 크리올리요 프란시스코 산타 크루스의 밀고로 배신당해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고, 같은 해 5월 18일 가족들이 처형되는 것을 지켜본 뒤 자신도 살해당했습니다.
처형은 잔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의 혀는 잘리고, 사지는 네 방향으로 달리는 말에 묶였습니다. 죽음이 너무 늦어지자 처형 담당자는 목을 베라고 명령했습니다.
오늘날 투팍 아마루 2세는 페루, 나아가 스페인령 아메리카 전체의 독립 과정을 연 지도자로 기억됩니다. 그는 원주민, 메스티소, 크리올리요, 심지어 스페인인까지 해방의 대의 아래 하나로 모은 다원적 정치를 실현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MRTA)
MRTA(투팍 아마루 혁명운동)는 1982년 페루에서 창설된 조직으로, 투팍 아마루 2세에게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극좌 성향의 이 무장 단체는 강도 행위와 부유층 납치를 통해 몸값을 요구하며 활동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볼리비아, 에콰도르, 칠레에도 조직원이 활동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1996년 페루 리마에서 일어난 일본 대사 공저 점거 사건입니다. 외교관은 판사, 정치인, 기업인 등 490명의 인질과 함께 건물에 갇혔습니다.
인질극은 126일간 이어졌으며, 442명의 페루 정치범 석방이 요구되었습니다. 1997년 4월 22일,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의 지휘 아래 벌어진 구출 작전에서 MRTA 소속 14명이 사살되었습니다.
석방된 인질들은 언론에 "항복하려던 많은 대원들이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했다"고 증언했으며, 이 작전은 국제사회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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