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 올림피아 고고학 유적지가 자리한 곳은 1766년 영국의 골동품 수집가 리처드 챈들러(Richard Chandler)에 의해 재발견되었습니다. 이 성소는 오랫동안 강물 범람으로 쌓인 것으로 여겨지는 두께 8m의 충적 퇴적층 아래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조사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운동 경기인 올림픽이 열렸던 이 성소는 반복된 쓰나미로 인해 매몰된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챈들러는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을 따라 엘리스 지방을 찾았고, 그곳에서 제우스 신전의 흔적과 함께 건물의 일부 및 도리아식 수도(柱頭)를 확인했습니다.
본격적인 체계적 발굴은 1829년에야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해 5월 10일, 프랑스 고고학자 레옹-장-조제프 뒤부아(Léon-Jean-Joseph Dubois)와 아벨 블루에(Abel Blouet)는 당시 어떠한 건물 흔적도 남아 있지 않던 황량한 대지에서 작업을 개시했습니다.
1875년부터는 독일 고고학 연구소가 발굴을 주관하며 주요 구조물과 성역 구역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936년 이 팀에 합류한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독일 고고학자 에밀 쿤체(Emil Kunze)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연구소 소장으로 복귀해 발굴을 이끌었고, 1952년에는 알프레드 말비츠(Alfred Mallwitz)가 합류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레오니다이온(Leonidaion)과 경기장 북쪽 벽을 발굴했으며, 성역 남동쪽에서 청동기·도자기·테라코타 유물로 가득 찬 잔해 구덩이 140개를 발견했습니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는 성소 중앙에 세워졌던 비잔틴 교회 유적 발굴에 착수했습니다. 그곳에서 상아, 준보석, 유리 장식품, 그리고 수많은 조각가의 도구가 출토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미 이곳이 위대한 조각가 피디아스(Phidias)가 걸작 크리세판티누스(금·상아) 제우스상을 제작한 공방일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나는 피디아스의 것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작은 도기 컵이 출토되면서 이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놀라움이 아니었고, 마지막 놀라움이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1961년 경기장 최종 발굴 과정에서 제방을 덮고 있던 흙 속에서 수백 점의 무기와 갑옷 파편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들은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으로 구성되어, 그리스 폴리스들이 제우스에게 바치기 위해 이곳에 세운 트로피(전승 기념물)의 일부였습니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코린트식 투구가 있었습니다. 정수리 부분이 결실되어 현장에서 발견된 다른 투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단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바로 'ΜΙΛΤΙΑΔΕΣ ΑΝΕ(Θ)ΕΚΕΝ (Τ)ΩΙ ΔΙ'(밀티아데스가 제우스에게 바침)이라는 헌사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당대의 저명한 '밀티아데스'가 두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누가 이 투구를 헌납했는지를 두고 약간의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의 합의는 기원전 550년경 태어나 기원전 488년에 생을 마감한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장군, 집정관—즉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을 지휘한 스트라테고스(장군)라는 설입니다.
헌납자의 소속과 적의 이름을 모두 생략했다는 점에서 이 헌납은 분명히 이례적입니다. A.J. 그레이엄(A.J. Graham)은 그 이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전투 자체가 너무나 유명했기에 승리한 아테네 사령관의 이름만으로 충분했고, 나머지는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투구는 기원전 490년 8월 12일 마라톤 전투에서 밀티아데스가 실제로 착용했던 것일 수 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날 10,000명의 아테네인과 1,000명의 플라타이아인은 10명의 스트라테고스가 지휘하는 약 25,000명의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습니다. 이들 지휘관 중 가장 노련하고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젊은이 밀티아데스였습니다. 페르시아군 상륙 5일 만에 전투에 돌입할 것을 처음 제안한 사람도 바로 그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시점부터 최종 결정권은 밀티아데스에게 넘어갑니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른 스트라테고스들이 차례로 자신의 지휘 권한(프리타네이아)을 그에게 양보했기 때문입니다.
전투의 결과는 그리스의 승리였으며, 이 승리는 몇 세기 후 헤로도토스 자신의 서사 덕분에 후세에 길이 남는 대서사시가 되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날 페르시아군은 6,400명이 전사한 반면, 아테네인은 192명, 플라타이아인은 11명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오늘날의 추산은 이보다 다소 높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치입니다).
올림피아에서 헌납된 밀티아데스의 투구는 청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착용 시 정수리에는 큰 문장(갑모)이 얹혔는데, 왕관 부분과 목 뒤쪽의 작은 금속 고리에 고정되었으나 이 문장은 끝내 남아 있지 못했습니다. 투구 옆면, 귀 바로 아래에는 작은 리벳 구멍이 뚫려 있는데, 아마도 턱끈이 빠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용도였을 것입니다. 내부에는 머리와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펠트 안감을 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500년의 세월을 견뎠지만 부서지고 훼손된 이 투구는 현재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상설 전시관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소장 유물 가운데 가장 귀중한 보물로 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