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3D 모델링으로 밝혀진 에티오피아 '검은 예루살렘' 라리벨라의 건축 비밀

에티오피아가 중세 암석 조각 교회로 유명한 라리벨라(Lalibela)의 보존을 위해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곳에 대한 3D 모델링은 유적지의 건축 역사를 밝혀내고 있는데요, 이 글은 Sciences et Avenir 845호(2017년 7월)에 실린 기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3D 모델링으로 밝혀진 에티오피아  검은 예루살렘  라리벨라의 건축 비밀

베테 기요르기스(Bete Giyorgis)는 라리벨라의 화산암을 깎아 만든 11개 정교회 건축물 중 하나로, 약 12m 깊이의 구덩이 안에서 우뚝 솟아 있습니다. 터널을 통해 신자들은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이 에티오피아를 방문하는 동안 아디스아바바 정부는 에티오피아 천년 역사의 상징인 라리벨라 암석 교회의 보존을 위해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2017년 7월 Sciences et Avenir 845호에 실린 베르나데트 아르노 기자의 '검은 예루살렘' 특집 기사를 소개합니다.

베테 다나겔(Bete Danaghel), 베타 골고타-셀라시(Beta Golgota-Selassie), 베테 메드하네 알렘(Bete Medhane Alem), 베테 게브리엘-루파엘(성 가브리엘과 성 라파엘)… 그리고 가장 유명한 십자가 형태의 베테 기요르기스(성 게오르기)까지. 약 800년 동안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매년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북쪽으로 500km 떨어진 곳, 현무암 속에 새겨진 라리벨라의 동굴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해발 2,600m 고원지대에서 흰 갈비(gabi) 옷에 몸을 감싼 그들은 '검은 예루살렘'에서 기도를 올립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교단 중 하나인 에티오피아 정교회(4세기 창시)의 핵심 성지입니다.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 약 20헥타르 규모의 특별한 유적지는 이제 프랑스 연구팀이 그 역사를 추적하는 전례 없는 연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단일 암석 종교 건축물들의 건설 과정에 대해 우리가 가진 데이터는 전혀 없었다"고 CNRS(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UMR 8171) 연구책임자이자 클레르 보스크-티에세(CNRS)와 공동으로 이끄는 '라리벨라, 암석 유적지의 고고학' 프로젝트 총괄 마리 로르 데라(Marie-Laure Dérat)는 설명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프랑스 외무부, CNRS, Inrap,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목표는 깊이 12m까지 파여 들어간 11개 교회의 다양한 건설 단계를 규명하는 것입니다. 전통에 따르면 그 기원은 13세기 통치자 게브레 메스켈 라리벨라 왕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슬람이 급속히 팽창하던 시기, 1187년 무슬림의 재정복 이후 접근이 어려워진 예루살렘 대신, 에티오피아 기독교인들이 성지의 상징적인 공간에 모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고고학적 유물이 부족해 정확한 연대기를 확립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고 데라는 덧붙입니다. 결국 연구진은 고고학 프로젝트 모델링을 전문으로 하는 CNRS의 기술 플랫폼, 보르도의 아르케오비전(Archéovision) 연구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여러 시기에 걸친 굴착의 흔적

3D 기술의 활용은 유적지를 굴착 단계별로 재구성하고 디지털 복원을 제안함으로써, 건축 과정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작업을 크게 수월하게 만들었습니다. 연구진은 먼저 10~1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동굴 거주 단계를 밝혀냈습니다. 이후 석공들은 화산암을 정상부에서 시작해 내려가며 파내려갔고, 그 과정에서 갱도를 뚫어냈습니다. 이 초기 시설과 같은 시기의 묘지에 대한 조사를 통해 연구자들은 해당 시설이 비기독교 의식을 행하던 사회의 산물임을 확인했지만, 정확히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2세기에 이르러서야 라리벨라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종교 단지로 탈바꿈했다"고 데라는 설명합니다. 건축가들은 더 깊이 땅속으로 들어가 내부에서부터 순례자들을 맞이할 기둥이 늘어선 넓은 홀을 파냈고, 기존의 갱도와 기둥들은 새 교회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었습니다.

이러한 건축 단계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당시 성직자들이 지켜온 전례(예배 의식)의 변화도 함께 연구했습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지을 때 이집트 교회의 건축 방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고고학자는 말합니다. 7세기 말 나일강변에 이슬람이 도래하자 콥트 기독교인들은 새 교회 건립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그 대신 기존 교회 내부에 성소를 계속 늘려 나갔습니다.

성전문서가 보관된 비밀의 방

이러한 제약은 없었음에도 이집트 기독교인들과 매우 가까운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같은 방식을 따랐습니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성소(sanctuary)'의 존재입니다. 이는 에티오피아 교회에서 가장 은밀한 공간으로, 사제와 부제가 신자들의 시선 밖에서 예배를 집전하는 방입니다. 이곳에는 성전문서와 함께 타보트(tabot), 즉 성경에 묘사된 언약궁의 복제품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신성한 궤, 곧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졌다는 율법판을 담고 있다고 믿어지는 궤는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아들인 에티오피아 초대 왕 멜레니크 1세가 이스라엘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라리벨라의 독실한 군주는 왕조적 혈통을 통해 이 신화적 계보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에도 라리벨라 지역에서는 새로운 동굴 교회가 발굴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독교인들, 그리스 상인들

4세기에 '에티오피아'라는 이름을 갖게 되기 전, 악숨(Aksum) 왕국은 동지중해, 로마 제국, 인도양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교류의 결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상인들이 홍해 연안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교역 거점과 함께 교회들도 세워졌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4세기 에티오피아 해안에서 난파를 겪고 살아남은 프루멘티우스(Frumentius)라는 인물이, 이곳에 초창기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린 이집트 기독교 당국에 의해 에티오피아의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