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넷플릭스 영화 〈디그(The Dig)〉가 밝혀내는 영국 '암흑시대', 그 실체는 무엇인가?

넷플릭스 영화 〈디그(The Dig)〉는 오늘날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영국의 암흑시대, 즉 5~6세기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캉(Caen) 대학교 중세사 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알방 고티에(Alban Gautier)의 설명을 통해 이 시기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넷플릭스 영화 〈디그(The Dig)〉가 밝혀내는 영국  암흑시대 , 그 실체는 무엇인가?

넷플릭스 영화 〈디그〉에서 랄프 파인즈(Ralph Fiennes)가 고고학자 바질 브라운(Basil Brown) 역을 맡아 연기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디그〉는 영국 서튼후(Sutton Hoo)에서 발견된 선박 무덤의 놀라운 발굴 과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프랑스 과학지 〈사이앙스 에 뒈니르(Sciences et Avenir)〉 기자 베르나데트 아르노(Bernadette Arnaud)의 표현대로, 이 발견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발굴은 학계가 영국의 '암흑시대(Dark Ages)'를 이해하는 방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알방 고티에 교수가 이 격동의 시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줍니다.

Q. '암흑시대'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역사적 시기는 무엇인가요?

이 '암흑시대'를 정의하는 데에는 두 가지 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넓은 의미로, 400년부터 1000년까지를 가리킵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전기 중세(High Middle Ages)에 해당합니다. 다른 하나는 400년부터 600년까지, 즉 5세기와 6세기만을 한정하는 용법입니다. 저는 후자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자로 남긴 기록이 거의 전혀 남아 있지 않은 200년이 바로 이 시기이며, 우리의 이해가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두 세기이기 때문입니다.

"서튼후의 발견은 암흑시대의 끝자락에 이루어졌다"

Q. '암흑시대'의 시작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인가요?

410년, 로마 군대와 행정 체계의 철수입니다. 당시 브리튼 섬은 이미 3세기 반 동안 로마의 속주였는데, 이 시점에 국가 운영의 모든 장치가 섬을 떠났습니다. 하드리안 장벽처럼 인상적인 유산을 남긴 로마의 지배가 끝난 뒤, 약 200년에 걸쳐 문자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시대가 시작됩니다.

Q.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당시 브리튼 사회에서 문자의 사용은 철저하게 국가 운영과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세금 징수, 군대 운영, 도시 행정 등이 그 예입니다. 로마인들이 철수하면서 이러한 제도 전반이 붕괴했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 문자 기록 역시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대이동과 게르만족의 침입이 겹친 격변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역사가들이 역사의 실마리를 잇기 어려울 만큼 혼란스럽고, 이름 그대로 '어두운' 시대였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여러 설명 모델이 제안되어 왔으며, 고고학적 발견에 따라 대략 20년을 주기로 수정·보완되고 있습니다.

Q. 서튼후의 발견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의 것인가요?

서턴후는 620년 또는 630년경의 것으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암흑시대의 끝무렵에 해당합니다. 스태퍼드셔 호드(Staffordshire Hoard, 금·은 유물 수백 점이 발견된 유적으로 유명)는 7세기 후반의 것입니다. 즉 문자 기록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매우 더디던 시기의 유물들입니다. 이 덕분에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기록을 서로 비교·검증할 수 있으며, 연대를 짚을 수 있는 틀이 마련됩니다.

"규모가 제각각인 왕국들의 모자이크"

Q. 암흑시대가 저물면서 문자 기록이 되살아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섬 동부 지역의 기독교화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597년부터 교황이 파견한 사절단이 이 지역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들의 활동 내용을 보고했고, 이 문서들이 중요한 정보원이 됩니다. 암흑시대의 증인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존경받는 비드(Bede the Venerable)'입니다. 그는 730년 무렵, 즉 암흑시대가 끝난 뒤에 집필한 수도사 출신 역사가로, 출처를 성실히 밝히는 진중한 학자였습니다. 그는 카이사르 시대부터 이어지는 섬의 역사를 서술하려 한 최초의 인물이며, 이 200년의 공백을 메우려 노력했습니다. 7세기 전체의 이야기, 기독교의 부활, 섬과 대륙 사이의 무역, 그리고 여러 왕국 간의 충돌 역시 그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Q. 이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나요?

암흑시대의 브리튼 섬은 크기가 매우 다양한 왕국들의 모자이크였습니다. 가장 작은 왕국은 하나의 지방(canton) 규모였고, 가장 큰 왕국도 프랑스의 데파르트망(주) 2~3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 왕국들은 세력 차이가 컸으며, 강한 왕국들은 약한 왕국들을 속국으로 삼았습니다. 단순화하면, 서쪽에는 켈트어를 사용하는 브리튼계 왕국들이 있었고(오늘날 콘월과 웨일스의 기원), 동쪽에는 현대 영어의 조상이 되는 언어를 쓰는 앵글로색슨 지역이 자리했습니다. 서쪽 왕국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동쪽 왕국들은 다신교적 이교 신앙을 따랐으며, 이들은 7세기 동안 점차 기독교화되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과도기적 양상'은 서튼후 무덤에서도 확인됩니다. 기독교와는 완전히 무관한 유물들과 기독교에서 영감을 받은 유물들이 한곳에 함께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새겨진 두 개의 숟가락"

Q. 왜 이런 혼합된 양상이 나타난 걸까요?

이 무덤은 625년경에 사망한 라에왈드(Raedwald) 왕의 것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다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서튼후의 토양이 워낙 산성이 강해서 유기물, 즉 시신조차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라에왈드는 완전히 미지의 인물은 아닙니다. 존경받는 비드에 따르면 그는 칸터베리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이후 조상의 신앙으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는 서튼후 무덤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비기독교성 유물들과 더불어, 십자가가 표시되고 성 바울의 이름이 새겨진 두 개의 숟가락—성찬에 사용되던 것으로 추정되는—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서튼후에서 발견된 투구에 오딘을 연상시키는 요소가 담겨 있다고 분석합니다.

Q. 바이킹의 브리튼 침입이 아직 일어나기 전인데, 스칸디나비아 신화의 언급은 모순되지 않나요?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앵글로색슨의 이교 신앙은 스칸디나비아와 동일한 신들을 섬겼습니다. 다만 오딘이 그곳에서는 '워덴(Woden)'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뿐입니다.

Q. 이 암흑시대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물론 '왕좌의 게임'과 같은 판타지 작품들에 중요한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특히 이 왕국들의 전쟁적인 면모가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작은 왕국들은 불안정하고 경쟁적인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각 지역은 전사 무리를 통솔하는 지도자가 이끌었고, 이 전사들은 보수를 지급받고 포상받아야 했습니다. 그 수단은 곧 전리품과 군사적 성공이었으므로, 전쟁이 곧 주요 경제 활동이 된 것입니다. 큰 왕국들이 작은 왕국들을 점차 흡수해 가는 흐름도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샤를마뉴가 활약하던 8세기 프랑크 왕국과 같은 시기에 브리튼 섬에는 4~5개 왕국만 남게 됩니다. 반면 암흑시대 한복판이었던 500년 무렵에는 수십 개의 왕국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