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코르뱅(Alain Corbin)은 '감각의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프랑스의 대표적 역사가이자 파리 제1대학교(소르본) 명예교수다. 『사이언스 에 아베니르(Sciences et Avenir)』지의 질문에 답했다.
역사가 알랭 코르뱅
이 글은 2021년 7~9월호 『사이언스 에 아베니르 – 레장디스팡사블(n°206)』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1755년 리스본 지진, 왜 지구과학의 분수령인가
사이언스 에 아베니르: 1755년 만성절(11월 1일)에 일어난 리스본 지진을 지구과학의 핵심적인 전환점으로 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알랭 코르뱅: 리스본 지진은 엄청난 재난이었습니다. 지진과 해일이 연달아 닥쳤고, 이어 며칠간 불길이 이어져 최소 1만 명이 목숨을 잃었죠. 그런데 학자들은 이 참사를 단순히 하느님의 손길로 돌리지 않고, 설명과 분석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볼테르가 1756년 『리스본 재난에 관한 시』를 발표한 뒤, 홀바흐와 디드로는 이런 사건을 신의 섭리나 벌이 아니라 자연적 원인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또한 1755년부터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본격적인 지진 연구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과학적 논쟁은 자연의 비밀을 풀려는 시도였고, 학자들 사이에 토론의 공간이 열렸습니다. 당시 세 가지 설명이 제시되었는데, 첫째는 지하의 불을 원인으로 드는 것이었고, 둘째는 공기의 팽창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일으킨다는 설명(20세기까지 우세했던 견해), 셋째는 전기 유체가 도전체를 따라 순간적으로 전파되며 충격이 발생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알던 것과 모르던 것
— 당시의 지식 수준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계몽주의 시대에도 미지의 영역은 많았습니다. 1755년 학자들은 하늘을 몇 개의 단어로만 묘사했습니다. 어두운, 밝은, 비 오는, 폭우가 쏟아지는, 얼어붙는, 눈 내리는 하는 식이었죠. 무역풍은 알고 있었지만 대기 순환이나 폭풍의 발생 원인과 경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기상 현상이 매우 먼 곳에서 기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해된 것은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입니다. 1802년에는 영국인 루크 하워드가 구름의 명명법을 발표하고 구름의 형성 메커니즘과 변화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당시 안개는 지표에서 피어오르는 증기로 여겨졌고, 날씨 예보는 하늘을 읽고 느낄 줄 아는 노인들의 전유물로 치부되곤 했습니다.
지구 내부 구조는 더욱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깊은 시추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18세기에는 두 이론이 경쟁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지질학자 제임스 허턴의 추종자들인 플루톤주의자(화성론자)들은 지구를 아직도 뜨거운 물질을 품은 식은 불덩어리로 보았고, 독일의 아브라함 고틀로프 베르너를 따르는 넵튠주의자(수성론자)들은 바다가 지구를 빚었다고 믿었습니다.
극지방과 심해, 영원한 미지의 영역
— 극지방이나 심해를 탐사한 적이 있었습니까?
극지방은 20세기까지 접근조차 어려웠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바다가 얼 수 없다고 생각해, 대륙에서 흘러온 얼음 장벽 너머에는 자유로운 바다가 펼쳐져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수많은 탐험이 실패했고 선원들은 추위나 강풍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남극 최초의 주항해(1772~1775)를 이룩한 제임스 쿡조차 유빙에 막혀 남극에는 대륙이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심해 역시 미스터리로 남았습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해면 어부들이 잠영으로 도달하는 얕은 수심뿐이었고, 과학자들 역시 깊은 바다라는 생각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종교는 지구 탐구의 걸림돌이었나
— 종교는 지구에 대한 지식의 장애물이 되었습니까?
지질학적 역사는 오랫동안 성서적 역사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기독교권, 다시 말해 유럽과 식민제국에서는 성경이 우선했습니다. 지구와 모든 천체는 하느님이 창조한 것이죠. 17세기의 저명한 인물 보쉬에는 지구의 나이를 약 6천 년으로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 즉 인간의 악행을 응징한다는 논리는 18세기 과학적 설명 속에도 '홍수설'의 형태로 남았습니다. 거대한 심연의 물이 지구를 빚었다는 것이죠. 상상력은 접근할 수 없는 장소를 차지하며 강렬한 정서적 힘을 발휘했습니다. 사람들은 심연을 창조의 숨겨진 부분, 아니 세계의 어두운 면으로 보았습니다. 화산은 지구의 내장과 직접 닿아 있는 것처럼 여겨졌고, 19세기의 역사가 미셸레는 그것을 뛰는 심장으로 묘사했습니다. 극지방에는 용이나 유니콘이 살고 있다는 괴물 같은 상상의 동물들이 서식하는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반면 하늘은 하느님의 나라에 속한 영역이었습니다.
1860년대, 지구과학 지식의 가속화
— 1860년대에 지구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가속화되었다고 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시기에는 전례 없는 지식의 진보를 가능케 한 여러 현상이 동시에 맞물렸습니다. 우선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과학적·합리적 정신의 부상과 함께 성경에 대한 의존이 약해졌습니다. 국가들이 과학 연구 지원에 나선 것도 컸습니다. 기상학 분야에서는 나폴레옹 3세의 주도 아래 1856년 6월부터 파리 천문대가 전국 기상 전신망을 운영했습니다. 무엇보다 눈부신 기술 진보가 이런 발전을 뒷받침했습니다. 기상학에서는 관측값과 데이터의 전 세계적 교환 덕분에 하늘을 지도로 만들고 기단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죠. 1860년대에는 기구가 조종 가능해지고 계기를 장착하게 되었습니다. 항공 관측은 대기 공간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마침내 1902년 기상학자 레옹 테제랑 드 보르가 하층 대기와 상층 대기, 즉 대류권과 성층권을 구분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화산에 대한 지식도 진전되었습니다.
1866년, 페르디낭 푸케는 산토리니와 키클라데스 제도를 오래 연구한 끝에 분출 물질이 쌓여 화산 원뿔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는 지각의 취약선이라는 유망한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빙하에 대한 무지는 이미 1820~1840년 사이 줄어들었는데, 1837년 스위스의 루이 아가시가 빙하기 가설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지질 관측에 뒷받침된 이 지식은 마침내 골짜기에서 발견되는 괴석(전석)의 존재 등 당시의 풍경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통신 혁명과 지식 교환의 가속
— 이런 지식의 진보는 새로운 통신 수단의 발달과 교류의 가속화와 나란히 진행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한편으로는 학회의 확산이 연구와 과학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고, 모든 분야에서 국제 회의가 조직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기화와 해저 케이블의 보급, 해저 지형에 대한 이해의 발전 덕분에 세계 규모에서 정보가 빠르게 교환되며 지식의 가속화에 기여했습니다. 참고로 최초의 대서양 횡단 통신은 1858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때까지는 먼 곳에서 일어난 원인들을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815년 말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화산이 폭발하면서 북반구에서는 거의 2년에 걸쳐 기후 냉각, 건조한 안개, 폭우, 가려진 태양 등의 이상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현상이 폭발과 연관됐다는 사실은 한 세기가 지난 뒤에야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1883년, 탐보라에서 불과 70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인도네시아 화산 크라카토아가 폭발합니다. 이번에는 케이블과 전 세계 측정 기기망 덕분에 폭발의 연대기, 대기 조성에 미친 영향, 해일의 높이 등을 거의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지구과학이 이룬 놀라운 도약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 중 하나입니다.
프랑수아 폴리에(François Folliet) 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