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발견

함부르크 색슨 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000년 전 '뉴에부르크'의 재구성

독일 함부르크의 고고학자들이 최근 11세기 북부 독일에서 가장 컸던 색슨 성의 옛 성벽 목재를 발굴했습니다. 이들은 도시의 '암흑기'에 세워진 다양한 방어 시설들을 전시회에서 재구성하여 선보이고 있습니다.

함부르크 색슨 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000년 전  뉴에부르크 의 재구성

바로 1000년 전에 지어진 신성(新城, 뉴에부르크)은 12세기 이후 함부르크라는 도시가 발전해 나간 원점이 되는 곳입니다.

엘베 강과 알스터 강의 굽이진 수로 사이에 자리 잡은 함부르크는 베를린에 이어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 상당 부분은 최근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지난 20년간 고고학자들이 이룬 놀라운 발견 덕분에, 한자 동맹의 번영하는 무역 도시가 되기 전 함부르크의 '암흑기' 역사가 새롭게 쓰이고 있습니다.

암흑기 함부르크의 요새들

지난 20년간 함부르크 시 고고학자들이 진행한 발굴 조사 결과는 단순히 구시가지의 윤곽을 다시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학자들이 '암흑기' 연구의 근거로 삼아온 문헌 자료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습니다.

8세기부터 12세기 말까지 이 지역에는 눈에 보이는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헌에는 북유럽산 물자의 중계지였던 이곳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요새화된 거주지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들의 유적을 발견함으로써 도시 중세사의 공백을 메우고, 원래 핵심을 이루었던 여러 정착지들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번 연구 성과는 함부르크 고고학 박물관 기획 전시회를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함마부르크 자리에 세워진 최초의 색슨 정착지

현재 함부르크가 위치한 곳에 세워진 최초의 정착지는 색슨족 게르만 부족이 샤를마뉴 대제의 통치 직전에 건설했습니다. 색슨어 명칭인 '함마부르크(Hammaburg)'는 '습한 평야(또는 만)에 있는 성'이라는 뜻으로, 이미 성(城)의 성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흔적을 확인한 것은 지름 약 65미터의 작은 원형 방벽뿐입니다. 나무 울타리와 방어 해자로 보호된 이 성곽 안에는 추장의 집을 포함한 몇 채의 가옥만 있었고, 약 200명에 달하는 주민 대다수는 성벽 바깥, 점토를 발라 마감한 목조 가옥이나 움집에서 생활했습니다.

기독교화 시대의 함마부르크

함마부르크에 관한 최초의 문자 기록은 8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프랑크 왕국의 수도사 안스카리우스(801~865)가 샤를마뉴의 아들이자 서로마 황제를 계승한 경건왕 루트비히(778~840)의 명을 받아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안스카리우스에게는 색슨족 개종과 스칸디나비아로의 기독교 확장이라는 두 가지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이는 프랑크 왕국의 권력과 영향력을 북방으로 뻗치려는 포석이었습니다. 엘베 강변에 위치하고 바다로 접근 가능한 이 정착지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거점으로 선택되었고, 이 결정은 함마부르크의 운명을 결정지으며 제국 변경의 요충지로 만들었습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총독은 성터를 확장해야 했습니다. 길이 약 20미터에 달하는 대형 회관이 중심에 들어섰고, 그 주위로 작업장, 마구간, 헛간, 창고, 장인과 하인들의 주거지가 배치되었습니다. 함마부르크는 바이킹과 슬라브 영토 앞에 놓인 프랑크 왕국의 최후 전초기지였기에 모든 것이 경비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바이킹의 침공을 막지 못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핵심 문헌인 Vita Anskarii(안스카리우스 생애)에 따르면, 845년 바이킹이 정착지를 공격해 완전히 파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전기는 안스카리우스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림베르트가 그를 성인으로 시성시키기 위해 사망 직후 집필한 것입니다.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항구

그런데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전기 작가는 미래의 성인의 삶을 미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세기 동안 역사학자들을 오도해 온 위조까지 저질렀습니다. 림베르트는 함마부르크가 831~832년, 즉 안스카리우스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브레멘 주교구 산하의 대주교구 지위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쾰른이 종속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두 도시의 자율성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결국 교황은 893년 함마부르크를 공식적으로 북방의 대주교구로 지정했습니다. 이 교황의 판결은 바이킹의 유린 이후 잊혀졌던 정착지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900년경 새로운 성이 건설되었는데, 규모는 약 85×95미터로 훨씬 커졌습니다. 처음으로 성벽 안쪽에 가옥들이 들어섰고, 무엇보다 카스트룸(castrum, 요새)에 상인 정착지와 항구가 생겨났습니다.

1000년 전에 지어진 뉴에부르크

브레멘의 아담(1050년 이전~1085)의 기록에 따르면, 백작의 궁정과 주민들에게 비좁아진 함마부르크의 카스트룸을 대체하기 위해 1061년경 새로운 석조 건축물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최근 발견은 이 모호한 기록이 얼마나 오랫동안 연구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는지 보여줍니다.

브레멘의 아담은 새 성이 기존 성들과 같은 자리, 즉 현재 성모 대성당 지구에 있다고 암시했습니다. 그러나 2014~2015년부터 2020년까지 진행된 발굴 조사는 처음부터 뉴에부르크가 실제로는 더 서쪽, 반대편 강안의 현재 성 니콜라이 교회 지구에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알스터 강 굽이의 습한 토양에서 완벽하게 보존된 많은 목재 유물을 발견하면서, 역사가가 제시한 연대 또한 뒤집게 되었습니다. 연륜연대학 분석에 따르면 뉴에부르크는 두 단계로 건설되었습니다. 기초는 1021~10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1030년에서 1032년 사이에 확장되었습니다. 즉, 이 성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것입니다.

함부르크 색슨 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000년 전  뉴에부르크 의 재구성

2015년, 고고학자들은 뉴에부르크 성벽을 이루던 물푸레나무와 참나무 통나무를 발견했습니다. © 함부르크 고고학 박물관

북부 독일 최대의 요새

정확히 1000년 전에 지어진 뉴에부르크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완전히 재구성되었습니다. 삼각형에 둥근 형태의 성벽을 갖춘 이 성은 도시 서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오랫동안 석조로 여겨졌지만, 실제로는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것이 밝혀졌습니다.

직경 180미터에 달하는 이 성은 11세기 북부 독일에서 가장 큰 색슨 성입니다. 7,800제곱미터 면적을 차지한 카스트룸은 높이 5.5미터, 폭 36미터의 초목 성벽으로 보호받았으며, 그 위에는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건축 방식은 수많은 색슨 및 특히 슬라브계 중세 방벽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함부르크 색슨 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000년 전  뉴에부르크 의 재구성

오늘날 함부르크, 성 니콜라이 교회 아래에 재구성된 뉴에부르크. © 롤란트 바르체카 / 함부르크 고고학 박물관

주교에게는 구도시, 공작에게는 신도시

브레멘의 아담이 기록했듯, 색슨 공작 베른하르트 2세 빌룽(995~1059)은 함마부르크의 카스트룸을 주교 운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주교는 옛 성을 평탄화하고, 그 자리를 동쪽에서 보호하기 위해 '하이덴발(Heidenwall, 이교도의 성벽)'이라 불리는 성벽을 축조했습니다. 이러한 건설 과정을 통해 함부르크는 지역의 중심 도시로 부상했습니다.

이후 함부르크는 샤움부르크 백작가의 통치 아래 뉴에부르크 부지를 중심으로 계속 발전해 나갔습니다. 1188년, 매립되어 방치되었던 땅을 필지로 나누어 신도시가 조성되었습니다. 어업권과 관세 면제 등 다양한 특권에 끌린 상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뉴에부르크의 유적 위에 세워진 이 신도시가 바로 훗날 자유 한자 도시 함부르크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