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Thomas Mann)은 데뷔 소설 『부덴브룩 가족』(Buddenbrooks)으로 192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출판된 지 약 30년이 지난 후에야 작품의 가치가 세계적 명성으로 인정받은 셈입니다. 그의 문학적 위대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망명 시기에 완성된 『마법의 산』, 『파우스트 박사』 등 후속 걸작들은 20세기 문학사에 굳건한 자취를 남겼습니다.
뤼베크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
1875년 6월 6일, 토마스 만은 한자동맹 도시 뤼베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네 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자랐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보다 더 대조적인 부부였을 것입니다. 유서 깊은 한자 귀족 출신인 아버지는 중산층 뤼베크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로, 상인으로서 가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영사를 거쳐 마침내 상원의원에 올랐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습니다. 토마스 만은 자신의 어머니를 "매우 아름답고, 틀림없이 스페인풍 매력을 지닌 분"이라고 회상합니다. 남부 특유의 열정적 기질과 음악·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은 아버지의 실용적 상업 정신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고, 바로 이 이질적 감수성이 훗날 토마스 만의 문학적 재능의 씨앗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학교를 미워했던 소년 시절
토마스 만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소중하고 행복했던" 때로 묘사하지만, 형 하인리히(Heinrich Mann)와 마찬가지로 학교 자체는 끔찍이 싫어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중등학교 시절 나는 게으름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게으르고 완고하며 모든 일에 엉뚱한 조롱을 날렸고, 유서 깊은 학문 기관의 교사들에게 미움받았다." 결국 그는 형과 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학교를 떠났습니다.
이러한 선택에는 보수적 부르주아 도시 뤼베크에 대한 반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울한 고딕 양식 건물이 주는 답답함, 개인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좁은 사회 질서에 대한 거부감은 훗날 그의 소설 곳곳에 지속적으로 반영됩니다.
뮌헨으로의 이주와 문학의 시작
189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893년, 어머니는 막내 세 형제자매를 데리고 예술의 도시 뮌헨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뮌헨은 국제적 감각과 보헤미안 정신이 공존하는 만남의 장소로 불렸습니다. 토마스 만도 같은 해 어머니를 따라 뮌헨으로 건너가 화재보험사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했고, 첫 번째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성년이 되면 아버지 유산에서 매달 연금을 받을 수 있었던 그는 정규직에 얽매일 필요 없이 오롯이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부덴브룩 가족』
1896년 토마스 만은 형 하인리히를 따라 이탈리아로 떠났고, 바로 이곳에서 그의 가장 널리 읽힌 소설 『부덴브룩 가족』의 집필을 시작합니다. 그는 뤼베크 시절 살롱에서 나눈 대화록은 물론, 요리 레시피와 가족·친구·적대자들에 대한 전기적 정보까지 꼼꼼히 수집했습니다. 이 '가족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다수의 인물은 실제 가족 구성원이나 뤼베크 시민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물에 대한 아이러니한 묘사와 뤼베크에 대한 상세한 서술 탓에, 작품은 많은 뤼베크 시민들에게 '실화를 파헤친 소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도시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은 점이 오히려 모욕이라 여긴 이들도 있었고, 이것이 유명 시인과 고향 도시 사이에 오랜 긴장이 흐른 이유 중 하나입니다.
1900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1901년 피셔 출판사(Fischer Verlag)를 통해 2권짜리 초판으로 간행되었지만 초기 반응은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1903년 단권본 제2판이 나오면서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토마스 만은 일약 명성을 얻게 됩니다. 1929년 노벨위원회는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며, 그 이유로 "현대 문학의 고전으로서 해가 갈수록 커지는 인정"을 들었습니다.
카티아 프링스하임과의 결혼
뮌헨으로 돌아온 토마스 만은 1898년 풍자 잡지 〈심플리치시무스(Simplicissimus)〉에서 약 1년간 일했으며, 슈바빙의 예술가적 분위기를 만끽했습니다. 1899년부터는 동성애적 감정을 품었던 화가 폴 에렌베르크(Paul Ehrenberg)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현실에서 두 사람이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라는 걸작으로 문학적 승화를 이룹니다.
1905년 그는 뮌헨의 명문가 출신인 카타리나 '카티아' 프링스하임(Katharina "Katia" Pringsheim)과 결혼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안정된 가정을 이룬 그와 카티아 사이에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긴 창작 위기 끝에 온 『마법의 산』
가정을 이루고 성공한 작가였음에도 만의 내면은 늘 불안했습니다. 겉으로는 완벽한 가부장의 모습을 유지한 채, 오직 일기장 속에서만 진심을 드러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재능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내면의 갈등은 역설적으로 그의 문학에 깊이를 더했지만, 그 기준이 지나치게 높았던 탓에 『부덴브룩 가족』 이후 대걸작 『마법의 산(Der Zauberberg)』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무려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망명의 시작: 1933년, 조국을 등지다
정치적 문제에서 토마스 만의 입장은 결코 빠르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옹호했고, 1920년경까지는 우파 정당의 성장에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922년 외무장관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가 암살된 이후 그의 방향은 확고해졌습니다. 정치적 반동주의자에서 출발한 그는 수년에 걸쳐 민주주의의 신념 있는 옹호자로 변모했고, 1930년대 말에는 반파시즘과 사회주의에 대한 공감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1933년, 딸 에리카(Erika)와 아들 클라우스(Klaus)의 만류에 따라 토마스 만은 강연 여행 중이던 독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망명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독일 시민권은 물론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프랑스의 산리쉬르메(Sanary-sur-Mer)를 거쳐 취리히를 지나, 1938년 마침내 미국에 도착합니다. 첫 목적지는 프린스턴으로, 그곳 대학에서 강의했습니다. 3년 후 가족은 캘리포니아 퍼시픽 팰리세이즈(Pacific Palisades)로 자리를 옮겼고, 1944년 토마스 만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합니다.
이 망명 시기에 그는 독일의 운명을 응축한 노년 소설 『파우스트 박사(Doktor Faustus)』를 집필했습니다. 이 시기의 만은 특히 다작였으며, 독일 국민을 향한 라디오 연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글들을 활발하게 발표했습니다.
전후 독일 방문과 클라우스의 죽음
1949년, 토마스 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을 방문했습니다.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 시는 이 시인에게 괴테상(Goethepreis)을 수여했고, 그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화해와 새로운 출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공적인 귀환은 아들 클라우스의 자살이라는 그늘에 가려집니다. 토마스 만은 아들의 죽음에 제3자의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를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집착'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가족 내 자살 문제를 비롯한 사적인 고민은 오직 일기장에만 담았습니다.
매카시 시대를 피해 유럽으로 영구 귀환
매카시 시대의 미국에서 공산주의 혐의를 받게 되자, 토마스 만은 1952년 유럽으로 영구 귀환을 결심합니다. 스위스에서 거처를 물색한 그는 처음에 에를렌바흐(Erlenbach)에 머물다, 마침내 취리히 근교의 친숙한 킬히베르크(Kilchberg)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말년까지도 멈추지 않고 집필을 이어가 1954년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을 출판했고, 1955년에는 실러를 주제로 두 차례의 연설을 남겼습니다.
고향 뤼베크의 화해, 그리고 마지막 순간
전기 작가 클라우스 슈뢰터(Klaus Schröter)는 1955년 5월 20일을 "토마스 만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하고 감동적인 순간이 준비되던 날"이라고 묘사합니다. 바로 그날, 고향 뤼베크가 마침내 이 위대한 작가에게 명예 시민권을 수여한 것입니다. 슈뢰터에 따르면 이것은 중요한 화해의 몸짓이었고, 토마스 만은 "조국과 평화를 이룬 이 재회에 감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과 몇 주 후인 1955년 8월 12일, 토마스 만은 취리히 칸토날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뤼베크의 반항아였던 소년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20세기 최고의 문학 거장으로 돌아오기까지, 그의 삶 그 자체가 한 편의 장대한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