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윈스턴 처칠 전기: 피와 눈물로 승리를 이끈 20세기의 거인

윈스턴 처칠 전기: 피와 눈물로 승리를 이끈 20세기의 거인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부터 1945년까지, 그리고 다시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영국 총리를 지낸 영국의 정치가입니다. 영국 정치에서 이례적인 존재였던 처칠은 비할 데 없이 긴 정치 경력을 자랑했습니다. 1930년대 초반부터 그는 독일 나치즘의 부상을 유럽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간파했으며,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영국의 저항과 연합국의 추축국 승리를 설계한 주역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후에는 1946년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며 냉전 시대의 막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귀족의 혈통, 윈스턴 처칠의 탄생

처칠의 아기 같은 얼굴 뒤에는 강렬한 기개가 숨겨져 있습니다. 1874년 11월 30일에 태어난 그는 말버러 공작가의 후손으로, 인도와 수단에서 기병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보어전쟁(1899~1902) 당시 남아프리카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화려하게 탈출하면서 영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윈스턴 처칠 전기: 피와 눈물로 승리를 이끈 20세기의 거인1900년 보수당 의원으로 선출되어 하원에 입성한 그는 거의 쉬지 않고 약 60년간 의석을 지켰습니다. 예리한 분석력, 흔들림 없는 솔직함, 강렬한 웅변, 재치 넘치는 반박 감각은 하원 토론의 스타일과 내용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계의 이단아, 기성 질서를 넘나들다

긴 정치 경력 동안 처칠은 무역부, 내무부 등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해군대신(1911~1915)으로 임명된 그는 부두 노동자와 철도 노동자의 대파업을 진압하는 한편, 영국 함대를 대폭 현대화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직접 추진한 다르다넬스 원정의 실패는 해군대신 사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프랑스 전선에서 대대 지휘관으로 복무한 뒤 로이드 조지 연립내각에 합류하여 1917년부터 1922년까지 군수장관과 육군장관을 역임했습니다. 자유당과 로이드 조지 정부의 몰락과 함께 1922년부터 1924년까지는 의회 밖으로 밀려나는 시련도 겪었습니다.

1924년 보수당 의원으로 재선된 그는 스탠리 볼드윈 보수정부(1924~1929)에서 재무장관에 임명됩니다. 파운드화를 금본위제에 고정하는 정책을 단행했으나, 이는 영국 경제에 참담한 결과를 낳았고 1926년 대규모 사회 위기를 촉발했으며, 그는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과 격렬히 충돌했습니다. 1929년 보수당의 선거 패배로 권좌에서 물러난 그는 1930년대에 주로 집필 활동에 몰두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인도의 자치에 반대했고, 1936년 에드워드 8세 퇴위 위기에서는 국왕의 편에 섰습니다.

분류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던 그는 전통적인 정치 구도를 뒤흔들며 보수당과 자유당을 오갔습니다. 그의 정치 업적에는 빛나는 성공(사회 입법, 영국 함대 개편)도 있었지만 쓰라린 실패(다르다넬스 원정, 반볼셰비키 투쟁 지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야말로 처칠의 역사적 위상을 온전히 드러낸 무대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이미 영국의 전쟁 수행을 조직하며 군 지도자로서의 재능을 엿보였지만, 그의 명성을 확고히 세운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풍 속에서 나라를 지키다

윈스턴 처칠 전기: 피와 눈물로 승리를 이끈 20세기의 거인처칠의 경력 전반에서 주목할 점은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보는 예지력입니다. 그는 나치의 위험을 가장 먼저 간파하고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의 '유화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 정책은 1939년 9월 전쟁 발발을 막지 못했고, 처칠은 이 전쟁에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합니다.

해군대신으로 복귀한 그는 1940년 5월,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이 홀로 추축국에 맞서게 된 절체절명의 시점에 총리가 됩니다. 취임 연설에서 그는 국민의 저항 의지를 북돋았습니다. "내 정책은 바다에서, 육지에서, 하늘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며, 인류의 범죄 목록에서 가장 어둡고 야속한 폭정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나는 피와 고통과 땀과 눈물 외에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의 암울한 나날 동안 처칠의 투지와 열정적인 연설은 영국 국민이 끝까지 싸워나가도록 이끌었습니다.

1940년 6월 프랑스의 패배 이후, 그는 프랑스 함대가 독일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알제리 메르스엘케비르에서 프랑스 함대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1940년 7월 3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싸우겠다는 그의 필사적인 결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앤터니 이든의 도움으로 루스벨트 대통령과 실질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해 미국의 군사적·도덕적 지원을 확보했으며, 소련과 미국이 참전한 1941년 이후에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음에도 소련과 동맹을 맺는 현실적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그랜드 얼라이언스(대연합)'의 지도자들은 물론,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드골 장군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윈스턴 처칠 전기: 피와 눈물로 승리를 이끈 20세기의 거인전쟁 내내 모든 전선을 오가며 연합군 군사 전략의 조율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얄타 회담(1945)을 비롯한 주요 정상 회의에서도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다만 포츠담 회담에는 초반 협상에만 참여할 수 있었는데, 1945년 7월 총선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가 그를 대신해 정부 수반이 되었습니다.

끝까지 미래를 내다본 선견지명

전쟁 중 그는 소련과의 동맹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유럽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주의적 성향을 일찌감치 경고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는 공산 정권이 동유럽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들을 차례로 축출하면서 그의 직감은 현실로 확인되었습니다. 1946년 유명한 풀턴 연설에서 그는 유럽을 가로지른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습니다. 나아가 같은 해 9월 취리히 연설에서는 "미국 합중국과 같은 유럽 합중국" 건설을 제안하며 "이 시급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은 반드시 화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20세기 전반부의 역사에서 처칠은 자신의 시대가 겪은 모든 정치적 전환점을 관통하는 놀라운 궤적을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1955년 정계 은퇴할 때 그는 국민의 존경과 모든 정당,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신뢰를 받는 위대한 정치가로서의 명성을 안고 물러났습니다. 이 기이할 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은 1953년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말년을 그림과 글쓰기에 바쳤으며, 자신이 평생 열렬히 옹호하던 대영제국의 해체를 지켜보아야 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윈스턴 처칠 전기: 피와 눈물로 승리를 이끈 20세기의 거인1965년 1월 24일 서거 후, 20세기 마지막 거인 중 한 사람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국장이 거행되었습니다. 처칠과 함께 영국은 또 하나의 세계, 즉 빅토리아 시대와 대영제국의 세계 패권이 지배하던 시대를 묻어 보냈습니다.

참고 문헌

- 프랑수아 케르소디(François Kersaudy), 『윈스턴 처칠』, Tallandier, 2015.

- 존 키건(John Keegan), 『윈스턴 처칠: 한 평생(Winston Churchill: A Life)』,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