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인물, 로렌조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는 별칭 '장엄한 로렌조(Lorenzo il Magnifico)'로도 불리며, 1469년부터 1492년 사망할 때까지 피렌체 공화국을 통치했습니다. 부유한 은행가 가문 메디치 가문 출신인 그는 1469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 도시 국가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고, 피렌체를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로 성장시켰습니다. 뛰어난 시적 재능을 지닌 그는 예술과 문학의 위대한 후원자이자 수호자였으며, 산드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등 다른 이탈리아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예술에 대한 애정으로 르네상스라는 예술적 폭발을 가능하게 한 군주의 전형을 잘 보여줍니다.
피렌체의 군주가 되기까지
로렌조 데 메디치(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헌정한 인물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는 1449년 1월 1일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통풍으로 인해 '구퇴(Goutteux)'라 불린 피에로 데 메디치로, 로렌조는 1469년 그의 뒤를 계승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메디치 가문의 지배 체제를 확립한 할아버지 코시모 데 메디치(로렌조의 조부)의 손자이기도 했습니다. 코시모는 피렌체를 공화국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으로 통치한 인물입니다.
어린 로렌조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으며 일찍부터 예술과 철학에 심취했습니다. 건축 역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본인에게 배웠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렌체 내 세력뿐 아니라 밀라노 스포르차 가문 등 다른 군주들의 자녀들과 교류했고, 아버지는 그를 망설임 없이 로마를 포함한 외교 사절단에 파견했습니다.
1469년 12월, 로렌조는 아버지 피에로의 뒤를 이었습니다. 당시 피렌체에는 메디치 가문의 적들이 많았고, 정권 교체를 기회로 가문을 타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적들은 로렌조가 얼마나 신속하고 강경하게 대응할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반란 세력을 단호히 진압했고, 피렌체 영토 내 반란 진압을 위해 용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를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젊은 군주는 교황 식스토 4세와 공개적으로 대립하기까지 했습니다.
교황과의 대립
그럼에도 로렌조의 권력 기반이 확고해진 결정적 계기는 1478년의 파치 음모였습니다. 경쟁 가문인 파치 가문이 주도한 이 음모는 메디치 가문을 거의 무너뜨릴 뻔했고, 로렌조는 이 과정에서 동생 줄리아노를 잃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파치 가문을 부추긴 교황 식스토 4세, 시에나, 나폴리 왕국과 맞서게 되지만, 밀라노의 로도비코 '일 모로'의 지지를 얻습니다. 반면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거리를 두는 입장이었습니다.
'장엄한 로렌조'는 종교 의식 중 인문주의 시인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합니다. 피렌체 공화국과 시민들은 음모자들에게 등을 돌렸지만, 동맹 세력이 패배하자 교황은 로렌조를 파문하고 도시 전체에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포조 임페리알레 전투에서 밀라노군이 이탈하자 피렌체군은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로렌조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이번에는 외교로 민감한 국면을 돌파했습니다. 나폴리와 직접 평화를 성사시켰고, 이로 인해 식스토 4세도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1480년 금지령이 해제되며 피렌체에 대한 권력을 회복했습니다.
통치 후반기는 페라라 전쟁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비교적 평온했으며, 피렌체에서도 로렌조는 초기의 폭력적 이미지와 달리 현명한 군주로 비칩니다. 다만 가문은 메디치 은행의 재정난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예술에 눈을 돌리고, 지출을 아끼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위대한 후원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예술의 후원자, 장엄한 로렌조
이 피렌체의 정치가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문학을 가까이했습니다. 따라서 권력을 잡은 뒤 예술가들을 보호하는 후원자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피렌체는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인문주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친구이자 보호자였으며, 신플라톤주의 운동을 지지한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선대들처럼 그는 베로키오(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페루지노의 스승), 필리피노 리피,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보티첼리(동생 줄리아노의 유명한 초상화를 남긴 화가), 그리고 젊은 미켈란젤로에게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로렌조 본인도 여가 시간에는 시인으로 활동하며, 특히 1470년대에 피치노의 신플라톤주의와 단테의 영향을 받은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 시기 피렌체의 도시 풍경도 군주의 의지에 따라 크게 바뀌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의 전통을 이은 건축가 줄리아노 다 산갈로와 함께 프라토의 산타 마리아 델레 카르체리 성당, 산토 스피리토 성당의 성물실, 포조 아 카이아노의 빌라가 세워졌습니다. 베네데토 다 마야노는 스트로치 궁전을 건설했습니다. 장엄한 로렌조의 피렌체는 곧바로 르네상스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말년의 로렌조는 수사 사보나롤라의 피렌체 입성을 묵인했는데, 이는 이후 도시의 정치에 중대한 결과를 낳습니다. 실제로 로렌조는 1491년부터 병을 앓다가 1492년 4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 피에로가 뒤를 계승했으나 불과 2년 만에 추방되었고, 그 틈에 권력을 잡은 이는 다름 아닌 사보나롤라 자신이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깊은 불만을 품게 된 바로 그 인물입니다.
참고문헌
- I. 클루라(I. Cloulas), 『장엄한 로렌조』, Fayard, 1982.
- 피에르 라신(Pierre Racine), 『장엄한 로렌조』 전기, Ellipses,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