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모(呂母), 이름 그대로 '여씨 집안의 어머니'라는 뜻을 지닌 그녀는 제국 시대 초기의 고대 중국에서 신나라(新朝)에 맞선 농민 반란을 이끈 인물입니다.
기근
여모는 한나라 시대,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오늘날의 산둥성(중국 동해안)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서한 말기, 황태후 왕정군(王政君)에게 직계 후계자가 없자 그녀의 조카이자 승상이던 왕망(王莽)이 스스로 황제에 올라 신나라를 세웠습니다.
새 황제 왕망은 삼림과 미개간지의 국유화, 주요 상품에 대한 국가 독점 무역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대토지 소유권 해체에도 나섰지만 대지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물러섰습니다. 더욱이 그의 세금 정책은 농민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안겼습니다. 같은 시기 황허강(황하)이 범람하면서 곡물이 썩어가고 기근이 들었고, 이는 지주와 농민 모두의 불만을 한층 증폭시켰습니다.
봉기
이 무렵 여모는 상당한 재산을 지닌 과부였습니다. 서기 14년, 해곡현(海曲縣) 관청에서 일하던 그녀의 아들 여육(呂育)이 세금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처벌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가 불복종죄로 처형되었습니다. 분노한 여모는 아들의 복수를 결심합니다. 그녀는 재산을 팔아 농민들을 모집·무장시키고 식량과 말을 구입했습니다. 또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정부의 가혹한 세금 징수와 징병 정책에 대해 호소했고, 이미 불만에 가득 차 있던 백성들 사이에서 폭넓은 공감을 얻어냈습니다.
곧 수천 명의 전사가 그녀의 깃발 아래 모였습니다. 여모는 이들을 직접 조직하고 엄격한 규율을 부과했는데, 특히 농민의 토지를 약탈하는 행위를 엄금했습니다. 스스로 장군 칭호를 걸치고 군대를 이끌고 해곡현의 현성으로 진격한 그녀는 승리를 거두었으며, 여모의 명령에 따라 현령은 처형되었습니다.
적미군(赤眉軍)
전투 소식을 접한 왕망은 해곡에 증원군을 파견했지만, 여모의 군대는 이미 철수한 뒤였습니다. 이 승리로 여모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고, 그녀의 군대는 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반란군은 정부와 왕망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으며, 왕망은 그 규모에 압도되어 항복 협상을 위한 사절단을 여러 차례 보냈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서기 18년, 여모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많은 부하들이 다른 반란 세력에 합류했고, 이 새롭게 결성된 군대는 '적미군(赤眉軍)'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적미군은 이후 왕망 정권을 전복시키고 한나라를 부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요 반란 조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