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스파르타의 수호자, 여왕 아르키다미아의 생애와 저항

스파르타의 여왕, 아르키다미아

스파르타의 여왕 아르키다미아(Archidamia, 기원전 340년경~기원전 241년경)는 기원전 272년, 피로스 1세(Pyrrhus I)의 침공으로 스파르타가 포위되었을 때 스파르타 여성들의 저항을 이끌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스파르타의 이중 왕정과 왕비의 탄생

아르키다미아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습니다. 그녀는 기원전 340년경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에우리폰티드(Eurypontid) 왕조의 스파르타 왕 에우다미다스 1세(Eudamidas I)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7세기 리쿠르고스(Lycurgus)의 개혁 이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그리스 도시 국가 스파르타는 아가이드(Agiad) 왕조와 에우리폰티드 왕조, 두 가문에서 나온 두 명의 왕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독특한 이중 왕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에우다미다스 1세와 아르키다미아 사이에는 두 자녀, 훗날 왕이 되는 아르키다모스 4세(Archidamus IV)와 아게시스트라타(Agesistrata)가 태어났습니다. 에우다미다스 1세가 기원전 300년경 사망하자 아들 아르키다모스 4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그의 치세는 군사 작전으로 점철되다 기원전 275년경 전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후 아르키다미아의 손자이자 에우다미다스 2세(Eudamidas II)가 왕이 되었고, 그는 고모인 아게시스트라타와 결혼하여 아들 아기스 4세(Agis IV)를 낳았습니다. 이로 인해 아기스 4세는 아르키다미아의 증손자이자 외증손자가 되는 복잡한 가계도가 형성되었습니다.

피로스 1세의 침공

아르키다미아가 역사적 기록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72년, 피로스 1세의 스파르타 포위전 때입니다. 몰로시아이의 왕이자 야심 찬 정복자였던 피로스는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으나 큰 손실을 입고(피로스의 승리), 결국 패배한 뒤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 정복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기원전 272년, 스파르타의 왕자 클레오니무스(Cleonymus)가 피로스에게 스파르타 공격을 요청하며 자신이 권력을 잡게 해달라 청했습니다. 클레오니무스는 클레오메네스 2세(Cleomenes II)의 막내아들로, 부왕 사후 형의 아들에게 왕위가 넘어가자 권력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패권을 노리던 피로스는 이 제안을 수락했고, 수개월 뒤 보병 2만 7천 명, 기병 2천 명, 코끼리 20여 마리를 거느리고 스파르타 앞에 당도했습니다.

스파르타 공성전: 여성들의 저항

원로원인 게론테스(Gerontes, 60세 이상 남성 28명으로 구성)는 여성과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그들을 크레타 섬으로 비밀리에 대피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는 저서 <영웅전>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밤이 되자 라케다이몬인(스파르타인)들은 서로 논의하여 아내와 자식들을 몰래 크레타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여성들은 이에 반대했고, 그중 아르키다미아라는 여성이 창을 들고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가 모든 여성의 뜻을 전했다. 그녀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스파르타의 멸망 후에도 살아남고 싶어 하는 비겁한 존재로 여긴다면, 그것은 여성들에게 큰 해를 끼치는 일이라고 일갈했다."

이 논쟁이 여성들의 승리로 끝나자, 스파르타인들은 본격적인 방어전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수레를 바퀴 축까지 땅에 묻어 코끼리의 진입을 막는 참호를 파는 대규모 토목 공사였습니다. 치마를 걷어 올리거나 간소한 튜닉 차림으로 여성들도 이 작업에 동참해 전체 공사의 3분의 1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그녀들은 전투원들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전투 중에는 물자를 나르며 부상자들을 전장에서 후송하는 등 전방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시선 아래 승리하는 것은 달콤하며, 어머니와 누이의 품에서 죽는 것은 영광이다. 그것은 스파르타다운 죽음이다."

인상적인 방어 참호와 스파르타인들의 예상치 못한 완강한 저항, 그리고 원군(안티고노스 3세 도손의 마케도니아 군대 등)의 도착으로 피로스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본인이 부상까지 입자 결국 포위를 풀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90세 노구의 최후: 개혁의 동반자에서 희생자로

플루타르코스는 약 30년 뒤, 90세가 넘은 아르키다미아를 다시 기록합니다. 기원전 244년 왕위에 오른 증손자 아기스 4세는 리쿠르고스의 법도를 되살리고 채무 탕감과 토지 재분배 등 급진적인 개혁을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추진하려 했습니다. 이 개혁은 아르키다미아와 그의 딸 아게시스트라타, 당시 스파르타 최고 부호였던 두 여성이 자신들의 재산과 토지를 가장 먼저 내놓으며 동참함으로써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기스 4세가 전쟁으로 스파르타를 비운 사이, 정적인 레오니다스 2세(Leonidas II)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돌아온 아기스 4세는 은신했으나 배신당해 체포되었습니다. 소식이 전해지자 아르키다미아와 아게시스트라타는 곧장 옥으로 달려갔습니다.

"아기스의 체포 소식을 듣자마자,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옥으로 달려가 스파르타의 왕이 동료 시민들에 의해 재판받고 변론할 권리가 있음을 외치며 탄원했다."

군중이 왕을 구하러 몰려올 것을 두려워한 반대파는 재판과 처형을 서둘렀습니다. 아기스 4세가 처형되자, 아르키다미아와 아게시스트라타도 즉결 처형되었습니다. 집행관이 아게시스트라타에게 "네가 네 아들과 같은 생각을 가졌으니, 너도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르키다미아는 스파르타의 위기마다 조국과 가문을 위해 싸우다 생을 마감한, 스파르타 여성의 강인함과 애국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