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500년~2300년경, 고대 이집트 제5왕조 시대에 살았던 귀부인 헤페트(Hetpet)는 다산의 여신 하토르(Hathor)를 섬긴 여사제였습니다. 그녀는 기자(Giza) 피라미드 인근, 당시 권문세가들이 잠든 묘지에서 영면에 들었습니다.
하토르의 여사제
헤페트라는 이름은 1909년부터 학계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집트 카이로 근교 기자 피라미드 일대에서 진행된 발굴 조사에서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과 석재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018년 2월, 이집트 고고학자 팀이 제5왕조 고위 관료들의 무덤이 모인 묘지 안에서 헤페트의 무덤을 발견하고 발굴에 성공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높은 신분의 여인이었던 헤페트는 기원전 2400년경, 평화와 풍요가 지속되고 문화·예술이 눈부시게 꽃피우던 시기를 살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웅장한 피라미드 건설이 점차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를 상대적으로 소박한 규모의 건축물들이 대신했습니다. 파라오들은 궁전과 신전을 세웠는데, 특히 태양신 라(Ra)에게 바치는 태양 신전이 대표적입니다. 헤페트는 바로 이 시대에 하토르의 여사제로 활동한 인물입니다.
다산의 여신, 하토르
하토르는 이집트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신 중 하나로, 다산과 사랑, 모성, 축제, 아름다움, 음악, 기쁨을 관장했습니다. 소의 모습으로, 혹은 두 뿔 사이에 태양 원반을 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산모의 출산을 돕는 수호 여신으로서 왕실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폭넓게 숭배받았습니다.
나일 계곡 곳곳의 멤피스, 헬리오폴리스, 필라이 등지에는 하토르에게 바쳐진 신전과 예배당이 세워졌으며, 누비아, 시나이 반도, 레반트 지역에서도 그 숭배의 흔적이 확인됩니다. 나일강 범람을 기준으로 삼은 나일력의 세 번째 달은 '아티르(Athyr)', 즉 하토르의 이름을 딴 달이며, 매년 11월부터 1월 사이에는 범람과 함께 돌아오는 여신을 맞이하는 축제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여사제의 무덤
발굴된 헤페트의 무덤은 당시 특유의 건축 양식과 장식을 잘 보여줍니다. 무덤 입구는 ㄱ자(L자)형 방으로 이어지며, 그 안에는 정화용 수조가 마련되어 있고 그 위에 여사제의 이름과 칭호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무덤에서는 보존 상태가 뛰어난 벽화들과 희소한 장면들이 다수 확인되었습니다. 헤페트는 사냥과 낚시 장면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런 활동은 통상 엘리트 남성에게만 그려지던 것이어서 여성의 모습이 담긴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합니다. 그 외에도 가슴을 드러낸 춤꾼들, 가죽과 금속 가공에 종사하는 남녀 노동자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특히 길들여진 원숭이가 과일을 따거나 바구니를 들고, 연주단 앞에서 춤추는 기발한 장면도 등장하는데, 이는 고대 이집트 회화에서 매우 드문 소재로 여겨집니다.
이 일대에서 계속되고 있는 발굴 조사는 앞으로 또 다른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