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구즈(Marie Gouze), 즉 마리올랭프 드 구즈(Marie-Olympe de Gouges, 1748~1793)는 정치가이자 논객으로 활동한 프랑스의 페미니스트이자 문인이다. 그녀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비롯해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수많은 글을 남겼으며, 독립적인 성격과 진보적인 사상은 결국 그녀를 비극적 최후로 이끌었다.
결혼에 매이지 않은 삶
1748년 5월 7일 앙 무아세(Anne Mouisset)의 딸로 태어난 마리 구즈는 공식적으로 정육점 주인 피에르 구즈(Pierre Gouze)의 딸로 등록되었지만, 실제로는 후작 장자크 르프랑 드 퐁피냥(Jean-Jacques Lefranc de Pompignan)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18세가 되던 해 올랭프는 파리의 요식업자 루이이브 오브리(Louis-Yves Aubry)와 결혼했다. 그는 아마도 가문의 정육점 단골손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아들 피에르를 낳았지만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결혼 생활에 환멸을 느낀 올랭프는 다시는 재혼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파리에 사는 자매를 찾아 떠났고, 그곳에서 피에르에게 세심한 교육을 시켰으며 '올랭프 드 구즈'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해군 고위 관료 자크 비에트릭 드 로지에르(Jacques Biétrix de Rozières)와 만나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이어지는 깊은 관계를 맺었다.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
교양 있고 학식이 깊었던 올랭프 드 구즈는 살롱을 드나들며 문인들과 교류했고, 글쓰기를 시작해 정치적 색채가 짙은 극단까지 창단했다. 1785년에는 노예들의 참상에 주목하고 당시 시행 중이던 흑인법(Code Noir)을 비판하는 연극 『흑인 노예제』를 발표했다. 그러나 상연이 금지되었고, 이 연극 때문에 올랭프는 바스티유 감옥에 갈 뻔하기도 했다. 초연은 1789년에야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그녀는 노예의 처우에 관한 여러 글을 계속 썼으며, 노예제 폐지를 추진하던 '흑인 친구 협회(Société des amis des Noirs)'의 회원이 되었다.
올랭프는 사회 개혁 방안을 담은 『애국적 논고』를 비롯해 수많은 정치 저술을 남겼다. 1792년에는 지롱드파에 합류하며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페미니스트였던 그녀는 남성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일들을 여성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었으며, 여성이 정치·사회적 논의에 참여할 권리를 위해 싸웠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본떠 집필한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그녀는 시민권과 정치권에서의 양성 평등을 천명했다. 특히 이런 문장을 남겼다.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연단에 오를 권리 또한 가져야 한다."
그녀는 이혼 제도의 확립, 종교 혼인의 폐지, 혼외자에 대한 법적 인정, 산부인원 설립, 걸인 수용소 설립 등을 적극적으로 운동했다. 인도주의자였던 그녀는 국왕 처형에 반대 입장을 밝혔고,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를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제1조. 여성은 자유롭게 태어나 권리에 있어 남성과 평등하게 산다. 사회적 구별은 오직 공공의 이익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
제2조. 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여성과 남성의 자연적이며 불가침의 권리를 보존하는 데 있다. 이 권리란 자유, 소유, 안전, 그리고 무엇보다 억압에 대한 저항이다.
제3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 속한다. 국민이란 여성과 남성의 결합일 뿐이며, 어떤 기관도 어떤 개인도 명백히 국민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제4조. 자유와 정의는 타인의 것을 돌려주는 데 있다. 따라서 여성의 자연권 행사에는 남성이 가하는 영원한 폭정 외에 어떠한 한계도 없으며, 이 한계는 자연과 이성의 법칙에 의해 개혁되어야 한다.
"조국의 아이들이여, 나의 죽음을 갚아 줄 것이다"
샤를로트 코르데처럼 올랭프 드 구즈 역시 1792년 9월 왕의 지지자와 신하들이 학살당한 사건에 크게 분노했다. 그녀는 그 배후 세력, 특히 전국의 수감자 학살 확대를 제안하는 회람문에 서명한 장피에르 마라(Jean-Pierre Marat)를 강하게 비판했다. 1793년 봄에는 저술을 통해 혁명의 과잉과 독재로 향할 위험을 공개적으로 고발했다. 같은 해 8월 6일, 공화주의 원칙에 의문을 제기한 글을 쓴 혐의로 체포되었고, 혁명재판소로 이송되어 기소된 뒤 11월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1793년 11월 3일,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남긴 뒤—이 편지는 검열에 걸려 전해지지 못했다—올랭프 드 구즈는 단두대에 올랐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조국의 아이들이여, 나의 죽음을 갚아 줄 것이다."
그녀의 처형 이후 혁명정부는 여성 정치 클럽 활동을 전면 금지했지만, 그녀가 남긴 선언은 훗날 세계 여성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올랭프 드 구즈는 오늘날 18세기 말을 대표하는 위대한 인도주의자이자 여성 인권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