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필리핀 최초의 여성 혁명가, '라 헤네랄라' 가브리엘라 실랑

마리아 호세파 가브리엘라 카리뇨 실랑(María Josefa Gabriela Cariño Silang, 1731~1763)은 필리핀 역사상 최초로 스페인 식민 지배에 맞선 혁명을 이끈 여성입니다. 남편이 암살당하자 그의 뒤를 이어 혁명 운동을 지휘했으며, 스스로 체포되어 처형될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점령기 아래의 유년 시절

필리핀 최초의 여성 혁명가,  라 헤네랄라  가브리엘라 실랑

가브리엘라는 1731년 3월 19일 필리핀 일로코스수르주의 산타에서 원주민 팅구안(이트네그)족 어머니와 스페인 상인 안셀모 카리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식민 통치는 주로 교회와 그 서열 조직, 즉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통해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점령에 대한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반란은 수시로 일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갈라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가브리엘라는 수녀원 부설 초등학교에 다니며 본당 신부로부터 종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20세가 되던 해 아버지의 주선으로 부유한 상인 토마스 밀란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3년 뒤 세상을 떠나 그녀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고 맙니다.

그 후 가브리엘라는 점령군에 맞서 싸우던 반군 지도자 디에고 실랑을 만나 1757년 재혼했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1년 전인 1756년에는 여러 열강이 여러 대륙에서 동시에 벌인 대규모 분쟁인 7년 전쟁이 발발한 상태였습니다.

스페인에 맞선 반란

1762년 영국이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인도 병력을 동원한 영국군이 필리핀에 상륙했고, 큰 저항 없이 마닐라를 점령했습니다. 디에고와 가브리엘라 실랑 부부는 이 사태를 스페인 관리들을 몰아내고 현지 필리핀인으로 대체할 절호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자이자 조언자, 나아가 사실상 부관 역할을 맡은 가브리엘라의 곁에서 디에고는 영국과 협력했고, 일로코스수르주 주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영국은 스페인에 맞선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지만, 정작 그 지원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측은 디에고에게 현상금을 걸어 대응했습니다. 1763년 5월, 옛 동료였던 미겔 비코스와 페드로 베베베가 디에고를 암살했습니다. 남편과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두 번째로 과부가 된 가브리엘라는 아브라주의 타이움으로 피신하여 삼촌 니콜라스 카리뇨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남편의 뒤를 이어 스페인 점령군에 대한 반란을 직접 이끌게 됩니다. 디에고의 죽음으로 무너졌던 반군의 사기를 가브리엘라가 되살려낸 것입니다. 그녀는 미겔 플로레스와 타가부엔 인피엘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새 거점을 마련한 뒤 반군 병력을 규합하여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말을 타고 볼로 나이프(마체테와 비슷한 칼)로 싸우는 모습이 오늘날 대중적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필리핀 최초의 여성 혁명가,  라 헤네랄라  가브리엘라 실랑

'라 헤네랄라(La Generala)', 여장군 가브리엘라

가브리엘라 실랑은 고향 산타를 해방시키며 화려한 첫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패배에 자극받은 스페인군은 자신들을 위협한 최초의 필리핀 여성, '라 헤네랄라'를 진압하기 위해 더욱 총력을 다하게 됩니다. 가브리엘라는 피디간에 새로운 진영을 세웠는데, 이곳에서 어린 시절 헤어진 어머니를 다시 만났다고 전해집니다.

1763년 9월, 가브리엘라는 부대를 이끌고 비간 시를 포위 공격했습니다. 그녀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지만,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전황은 점차 기울었습니다. 공격이 끝날 무렵 반군은 적에게 압도되었고, 도주를 시도하던 가브리엘라는 남편의 살해범 미겔 비코스가 이끄는 부대에게 수십 명의 부관들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1763년 9월 20일, 가브리엘라 실랑과 그녀의 부하들은 비간 중심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후 미국과 일본의 점령기를 거쳐 필리핀은 1946년 7월 마침내 독립을 회복했습니다. 오늘날 가브리엘라 실랑은 필리핀 독립 투쟁의 상징이자, 그 투쟁 속에서 여성들이 차지한 위대한 위치를 보여주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