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수아즈 쥴리 아델라이드 베르나르(Jeanne Françoise Julie Adélaïde Bernard), 훗날 쥴리엣 또는 쥴리 레카미에로 불린 그녀(1777~1849)는 지성과 매력을 겸비한 프랑스의 상징적인 여인이었다. 그녀가 운영한 살롱에는 당대 정치계와 문화계의 최고 명사들이 모여들었다.
자크 로즈 레카미에, 아버지이자 남편
왕립 공증인의 딸로 태어난 장 프랑수아즈 쥴리 아델라이드 베르나르는 1777년 12월 3일 리옹에서 태어났다. 1786년 아버지가 재정 징수관으로 임명되면서 가족은 파리로 이주했고, 리옹의 수녀원 기숙학교에 맡겨져 있던 쥴리엣도 한 해 뒤 가족과 합류하게 된다.
1793년 4월, 프랑스 혁명 직후 이른바 '공포정치(Terror)'라 불리던 격동기에 15세의 쥴리엣은 부모의 친구였던 자크 로즈 레카미에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우애 어린 플라토닉한 것이었는데, 자크 로즈는 실제로 그녀의 친생부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 결혼은 혼란기에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97년부터 쥴리엣은 파리에서 살롱을 열기 시작했고, 이곳은 순식간에 수도의 상류사회와 문화·정치계 인사들이 모이는 명소가 되었다. 그리스 및 고대 양식을 가구와 의상에 접목한 선구자 중 한 명이었던 그녀는 고대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유행을 주도하며 파리 사교계의 트렌드세터로 자리매김했다. 부유한 은행가였던 남편 역시 성공을 거듭하여 1800년에는 프랑스은행(Banque de France)의 이사(Regent)에 올랐다.
쥴리엣의 살롱
쥴리엣 레카미에의 살롱은 그 강력한 영향력 덕분에 나폴레옹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결국 그녀의 살롱은 금지 명령을 받았고, 그녀와 가까웠던 마담 드 스탈(Madame de Staël)과 아드리앵 드 몽모랑시(Adrien de Montmorency)는 추방당했다. 1805년에는 재정 문제로 레카미에 부부가 저택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쥴리엣 본인도 제국 경찰의 명령에 따라 추방의 길에 올랐다.
그녀는 샬롱쉬르마른(Châlons-sur-Marne)과 리옹에서 잠시 머문 뒤 로마로 향했고, 1814년 4월 나폴레옹이 퇴위할 때까지 그곳에서 다시 살롱 문화를 꽃피웠다.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사교 활동을 재개했지만, 이번에는 손님들에게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 결과 그녀의 살롱은 더욱 문화적이고 문학적인 공간으로 변모했으며,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에드가 퀴네(Edgar Quinet), 토크빌(Tocqueville), 라마르틴(Lamartine), 발자크(Balzac)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손님으로 찾았다.
1819년, 재산상의 큰 타격 이후 쥴리엣은 아베오부아(Abbaye-aux-Bois)로 거처를 옮겨 수녀원 안에서 아파트를 빌려 살았다. 그곳에서도 계속 손님을 맞이하며 살롱을 이어갔고, 간헐적으로 이탈리아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지식인들의 모임을 조직하기도 했다. 1840년부터 건강이 점차 약화되면서 더욱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보냈다. 마침내 1849년 5월 11일, 쥴리엣 레카미에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였다.